Wholly messy라는 단어보다 더한 표현은 없을 만큼 온통 난장판이다. 포장이사를 불렀지만 방, 주방, 거실이 모두 일자형인 60년 된 집구조에서 일상적인 3 베드룸 구조로 이사를 가자니 짐을 어느 정도 버리고 분류를 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자초해야만 한다. 내가 살 집이니 물건마다 위치를 잡아야 하니 말이다.
초등학교 3학년때즘인가 큰 이모가 사주를 보는데 따라간 적이 있다.
“이 아이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참 좋을 팔자인데 여자라서 사는 게 여간 힘들겠어요. 강산을 피로 물들이고도 남을 아이인데…. 온 하늘이 지붕이니 어딜 가든 잘 적응하고 살 팔자예요..”
다른 말은 모르겠고, 여자라서 팔자가 힘들고 역마살이 끼었다는 정도가 아닐까? 강산을 피로 물들인다는 것은 해석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그 어르신의 말씀처럼 나는 전국 전 세계를 많이 쏘다녔고, 살아보기도 많이 했다. 나름의 노마드 인생을 살아보면서 물건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달라진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20년 가까이 가지고 다니는 기린 한쌍, 오리나무 테이블, 서랍장. 다른 것은 모두 버리고 당근마켓이나 벼룩 또는 다이소에서 핸디 하게 구매를 해도 이것들이 새삼 내 곁에 오랜 시간 있었다. 때로는 옷 한 벌에 랩탑하나만 들고 떠났던 시간들도 있었고, 때로는 무슨 애착이 있길래 아리바리 모든 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간 적도 있었다. 사용만을 목적에 두고 물건을 대하지만은 않았었나보다. 비록 여기 저리 이동을 많이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2년 전 당근마켓을 통해 물건을 거래하러 갔다가 노부인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학사모를 쓴 잘생긴 아들사진이 벽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었고, 노부인의 방에는 촛대 두 개와 성모상, 그리고 묵주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노부인이 치매가 심해져 어쩔 수 없이 요양원으로 모셨다며 사진 속의 훤칠한 아들이 어머니의 물건을 정리하러 온 것이었다. 나는 그 노부인의 물건인지도 모르고 당근을 하러 어쩌면 철없이 그 집엘 갔는지도 모른다.
사진 속의 아들은 어머니의 자랑처럼 S대를 나와 공직에서 자리를 잡고 어느새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렀다. 어머니의 물건이라고 하지만, 그도 어머니의 삶을 자신만큼은 알지 못했던 것 같았다. 가슴 한편 밀려오는 먹먹함이 그의 어머니 방을 매웠고 그도 나도 한참을 말없이 그녀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거래한 물건과 별도로 그녀가 키우다 말라비틀어진 군자란과 오랜 손길이 담긴 반짇고리함을 달라고 했다. 요양원은 그녀의 임종 전 마지막을 준비하기 위한 곳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 사랑하는 아들을 키우면서 그녀의 전부가 되었을 그를 위해 밥을 짓고 옷을 만졌을 그녀의 인생을 기억해주고 싶었다.
노부인이 가꾸다 방치된 군자란
노부인의 평생이 묻어있는 반짇고리함
군자란이 꽃을 피우고 누군가 그녀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가 덜 외롭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250km도 더 멀리 떨어진 곳까지 화초를 들고 이동하게 했다. 청승맞을지도 모르지만, 그저 그렇게 하고 싶었다. 군자란은 올봄에 황금오렌지빛의 크고 탐스러운 꽃을 피워냈다. 올봄 꽃이 피었을 땐 마음으로 꽃이 피었다는 기쁨을 전했는데....
물건에 대한 기억과 사연들이 있기 마련이고, 한두 번 이사해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도 마음이 아리고 눈물이 흐르는지 모르겠다.
지금 사는 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밤이면 천장에서 쥐가 돌아다녀서 잠을 설치는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쥐가 천장을 뚫고 얼굴 위로 떨어지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비가 오면 천장을 하도 거세게 때려 지붕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가슴을 졸일 때도 있었다. 이번 경북 폭우가 있던 날엔 무릎높이만큼 마당에 물이 차서 흙탕물 사이로 오가야 했고, 혹여나 보일러실에 긴 짐승 뱀이 들어오지는 않았을까 두려움에 창고문을 열어 비에 무탈한지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 날이 추우면 보일러가 얼어터졌고, 보일러가 괜찮으면 상하수도관이 얼어터져 몇 날며칠 물을 쓰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더한 것은 한 겨울에 실내온도가 평균 6~12도 되는 곳에서 지낸 것이다. 수면양말에 덧신까지 신고 추위에 근천 떨며 살아본 지난 시간이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그러나 적어도 내게 낭만은 있었던 시간이었다. 동서남북 어르신들과 수많은 눈들 사이에 쌓여 살았지만 그래도 어르신들의 과한 사랑도 받아보았고, 그들의 삶 속에 나도 함께 했던 시간들이었다.
옷가지 하나 챙기지 않고 빈 몸으로 캐나다로 야반도주할 때도 이렇게까지 마음이 저리지 않았는데 고작 걸어서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로 가는데도 이런 마음은 무엇일까? 손으로는 버리고, 비우고, 나와 계속 함께할 물건들과 버릴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지만, 마음은 복잡한 머릿속과 삶의 옷가지들을 다시 꺼내어 하나씩 확인하는 것이 파도가 되어 감정의 벽을 세차게 내리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후 물건을 정리할 때도 이런 마음은 아니었다.
이사가 이별만 같다
이사가 이별만 같다. 생과 사만이 아니라 매일이 어쩌면 이별인 것인가. 어제의 나와 이별, 오늘의 나와 만남.... 내가 몰랐던 나, 내가 겪어보지 않은 삶도 말이다. 이사를 다하고 각 위치에 맞게 짐을 정리하고 나서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면 어떤 마음일까. 어렴풋이 느껴지는 가을바람에 마음이 더 시릴지, 아니면 달빛 별빛에 마음을 실어 보내고 아침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이별이 또 하나의 챕터가 될 것을 알기에 마음을 맑게 씻어두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