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타고난 술꾼의 DNA를 가지고 났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양조장을 하시는 할아버지 덕분에 내가 한글을 떼기 훨씬 이전부터 막걸리부터 시작하여 술의 세계에 일찌감치 입문했다. 노란 주전자에 술을 담아 오면 엄마는 노란 양푼이 냄비를 부뚜막에 올려놓고 주걱으로 계속 저으며 막걸리를 끓이셨다. 넓은 대접에 따끈한 막걸리를 담아 아빠와 일하시는 분들에게 새참처럼 주셨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자리를 비우면 냉큼 부엌에 가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걸쭉한 막걸리를 한 국자 떠서 몰래 훔쳐먹었던 기억이 난다. 겨울철 흰 눈이 펑펑 내릴 때 훔쳐먹었던 막걸리는 어린 일곱 여덟 살의 나이였던 나에게 아직도 낭만과 추억으로 남아있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때가 그리울 때가 있다. 특히 눈이 내리는 날이면 더욱 그렇다. 지금 그 맛은 기억 속에서나 존재할뿐 현실에선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더 그리운지도 모른다.
허리까지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나는 세상에 나왔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한테 시집을 와 양조장과 정미소 일에 찌든 엄마는 아이를 키우고, 시부모를 모시는 데다 집안일에 밭일까지 하는 것이 너무 버거워 도망가고 싶었다고 하셨다. 엉덩이를 땅에 대고 잠시라도 앉을 틈 없이 종손집으로 시집을 가 죽도록 일을 하셨던 엄마는 월급 없는 식모살이 같았다고 하셨다. 그렇게 고단한 엄마가 또 아이를 가졌으니 두려웠던지 엄마는 나를 지우고 싶어 하셨지만, 병원에 갈 짬이 도무지 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낳기로 하셨단다. 그게 바로 나다.
이미 아이 셋을 출산한 엄마였어도 막내인 나를 낳을 때는 ‘이러다 죽지’싶은 두려움이 너무 컸다고 했다. 온 세상이 눈으로 다 덮인 날, 딸이 태어나서 엄마는 미역국도 못 얻어드셨단다. 그래도 엄마는 나를 이렇게 잘 키워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셨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허리까지 눈이 쌓이는 그 추운 날, 미역국조차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해도 젖을 물린 엄마의 사랑 때문인지 나는 겨울이 되면 말할 수 없는 포근함을 느낀다.
눈이 내리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것만 같고, 그저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몽글몽글 벅차오를 때가 많다. 술에 대한 기억이 항상 행복할 수만은 없다. 캐나다에 머물렀던 20여 년 전, 몇 해 중 한 해의 겨울 동안 난 1일 1병의 와인을 마셨다. 집에 돌아와 밤 깊도록 하염없이 내리는 눈에 취하고 술에 취했던 시간들이었다. 이십 대이니 얼마나 생각이 많았겠는가. 지금이라고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의 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였다. 에너지도 좋았고 열정은 너무 뜨거웠고 분출할 곳은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와인을 마시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벅차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울다 쉬다 울다 일기를 쓰다… 또 음악을 듣다 창가에 서성이다 그렇게 취한 몸을 가누며 아침을 맞았던 날들의 연속이 이었다. 타고난 술체질이었지만, 북받치는 눈물이 감당하기 버거워 나는 그 이후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내가 마시고 싶을 때, 좋은 분위기에서 좋은 사람과의 한 잔 또는 내가 정말 쉬고 싶을 때 정도 외엔 술을 마시지 않기로 룰을 정했다. 약속은 잘 지켜지고 있고, 체질도 변해서 한 모금만 들어가도 지금은 금세 취한다. 그러나 젊었던 20대의 그날들처럼 어찌할지몰라 속이 타들어가 흐르는 뜨거운 눈물은 없지만, 가슴 한 구석에는 냉랭한 세상에서 받은 상처와 아픔을 감싸 안을 따스한 온기가 있다. 그 온기는 내 안에서 내가 뿜어내는 몸부림이자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이들로부터 받아온 사랑이자 위로이다.
어젯밤, 마음이 가는 대로 살구와인 한 병에 빗소리를 음악 삼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보았다. 눈물보다는 벅찬 감동과 감사, 표현하기 힘든 내면의 응어리들이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것만 같았다. 때로는 생각 없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것도 나에게 주는 보너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와인 한 잔에도 어린 시절부터의 삶이,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 녹아있다는 것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삶이라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 언제 어디서나 담을 수 있는 그릇과 추억만 있다면 담기고 읊어질 수 있는 노래인가 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밤에도 이름 모를 새가 울어댄다. 올빼미나 부엉이만 밤새 눈을 뜨고 있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날이 새도록 지저귀는 가수새들도 많다. 이 새들도 나의 밤을 아름답게 추억하게 하는 조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