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을 찾은 날 대기실에 앉아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대쪽 소파에 머리카락을 하나로 단정히 묶고 반바지에 샌들을 신은 여자아이가 혼자 앉아 있는게 보였다. 그런가 보다 하며 나는 전자책을 읽으려 꺼내서 펼쳤다.
두어줄 읽었을까, 책에 붙박힌 시선 너머로 아이의 몸짓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아이는 소파에 손을 문지르고, 다리를 흔들거렸다. 원래 아이들은 가만히 있지 못하지만 그 아이의 몸짓은 다른 느낌이었다. 아이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왜일까, 아이는 왜 초조해하는 걸까. 궁금증이 일 무렵, 진료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이는 엄마에게 얼른 달려갔다.
" 엄마, 울었어? "
" 응... 00 앞에서 이런 모습 안보이려고 했는데, 미안해... "
" 의사 선생님이 뭐래? "
" 응...... "
9살쯤으로 보이는 아이는 엄마를 살피며 불안해했고 엄마는 아이가 불안해할까 봐 아무렇지 않은 듯하려 애썼다. 그 엄마와 아이가 불편할까 봐 책에 나의 시선을 묶어두었지만 이미 나는 그 모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이와 엄마가 떠난 빈자리에 아이의 불안과 초조가 남아있었다.
그 아이는 나의 곁에 서서 내가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빨래 너는 것을 바라보았고, 내가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책상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나를 보았다.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으면 그 아이가 있었고 잠을 못 이뤄 눈을 뜨면 여전히 그 아이가 있었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웠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차는 것 같으며 산소가 부족했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더니 비가 섞인 축축한 바람이 얼굴을 와락 껴안았다.
목에 보이지 않는 올가미가 채워져 있어 숨을 한번 내쉴 때마다 그 올가미가 조금씩 조여져 오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 안정이 안될 때 복용하라고 했던 약이 있었던 기억이 나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약이 없었다. 불안에 내 존재가 통째로 삼켜지는 것 같았다.
아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자기가 처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 엄마가 아이를 불안하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인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안다. 엄마의 드러나는 감정 외에 또 다른 감정이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안다. 그것은 나를 보호해줄 단 하나의 대상에 대한 원초적이고도 본능적인 느낌이다. 아이는 스스로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해줄 대상의 안전도 민감하게 느낀다. 엄마가 말로서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아이는 느낌으로 안다.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아이는 엄마의 괜찮다는 말을 믿고 싶으나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본능적으로 안전하지 않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이의 불안은 어른처럼 또렷하지 않다. 삶은 불투명하고 인생은 늘 계획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어른처럼 알지 못한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어떤 것도 예측하지 못한 채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에 압도당한다. 거대한 세상에 맞선 작은 병아리들 같은 존재가 바로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생존에 취약하다. 정서적으로도 어른만큼 강하지 못하다. 그런 아이들이 물리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 놓인 적이 있다면 아마 성인이 되어서도 그 감정을 잊지 못할 것이며 평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삶은 가차 없이 비정하다.
나는 어린 시절 생존을 위협받았고 지속적인 정서적 학대를 받았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의 인생은 내 것이며 그 책임 역시 내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나를 위협하던 어른들을 향한 증오와 원망들, 또한 나를 지켜주지 않았던 엄마에 대한 증오와 분노, 그들에 대한 해소되지 않은 분노가 아직도 나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낀다.
병원에서 보았던 그 아이는, 실체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압도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 아이는 바로 나였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 기억은 이미 많은 풍화를 거쳤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도 생생한 감정으로 놀라운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때의 감정을 그 아이로 인해 생생하게 지금 여기에서 느꼈고,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몹시 힘든 감정이었으리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내 불안의 뿌리를 다시 한번 몸소 체험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재난에 전쟁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전쟁 지대에서 복무한 군인의 4분의 1 가량이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미국 전체 인구의 대다수가 살면서 어느 시점에 폭력적인 범죄를 경험한다. 보다 정확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 여성 1200만 명이 성폭력 희생자이며, 전체 성폭력 희생자 중 절반 이상이 15세 미만 소녀들이다. 집에서 전쟁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많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300만 명의 어린이가 아동 학대 희생자나 방치된 아이로 보고된다.
이 가운데 100만 명은 어린이 보호를 담당하는 지역 당국이나 법원이 강제 조치를 취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다시 정리하면 해외 전쟁 지대에서 근무하는 군인이 한 명이라면 그 열 배의 아이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안에서 위태롭게 생활한다는 뜻이다. 성장 중인 아이에게 찾아온 공포와 고통의 원천이 적군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는 사람일 경우 회복은 너무나 힘들어진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더 큰 비극이다.
...............................한 사람을 집어삼킨 경험이 내면 가장 깊숙한 곳의 감각과 물리적 실재와의 관계, 즉 한 인간의 핵심이 되는 그 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밝혀지기 시작했다. 트라우마는 그저 과거 어느 때 일어나 끝난 사건이 아니라, 그 경험이 마음과 뇌, 몸에 자국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리고 이 자국은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현재를 살고 살아남기 위해 애쓰면서 계속 발생하는 결과물이다.
베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나는 아직도 과거의 감정을 현재에서 경험하고 있으므로 괴롭다. 이러한 감정을 글로 옮기는 것 또한 괴롭다. 손가락이 움직여 한 글자 한 글자가 화면에 나타나듯이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기억의 조각들 하나하나가 현재의 감정들을 이룬다. 내게는 이런 트라우마가 있다. 시시때때로 그것을 현재의 일처럼 경험하고 느낀다.
내게는 그것이 생존에 관한 불안이다. 나에게는 이런 트라우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