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의 말뚝

by 흔들리는 민들레








가까운 지인들에게는(지인도 별로 없긴 하지만) 결코 주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책이었다.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친척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책 속의 내용이, 책 속에 낱낱이 드러난 나의 상처가 수치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의 박격포 같은 지지와 격려와 찬사에 동의할 수 없었던 이유가 내 안의 아주 깊은 곳에 말뚝처럼 박혀있는 수치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의 감정 때문이었다. 3년간 쭉 그래 왔지만 언제나 그의 감정에 내 감정을 비추어보게 된다. 그는 거울이다.


3년을 한결같이 매주 병원에 갔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 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를 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두 딸의 엄마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내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나는 문제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살아오며 많은 곳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었고 살고 싶었다. 그래서 매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꽃잎이 쏟아지나 낙엽이 쏟아지나 갔다. 무조건 갔다. 가기 싫어도 꾹 참고 갔다.


가기가 너무너무 싫어서 내릴 정거장을 놓치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도 갔다. 주치의가 미워도 갔다. 그가 하는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와 가슴에 꽂혀도 그 다음주면 여지없이 같은 자리에 가서 마치 거짓말처럼 앉아 있었다.










정말 평범하고 싶었다. 조금은 부족하더라도, 가진 것이 없더라도 그런대로 살고 싶어지는 인생이 있지 않나. 마트에 가서 g당 최저가인 상품을 비교해서 고르고, 오르지 않는 아이 성적이나 남편의 월급을 걱정하면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타이어 같은 뱃살과 관절 통증이 늘어나더라도, 그래도 가끔 무탈한 날들이 감사해지는 그런 인생이 있지 않은가. 고급 와인이나 양주가 아니더라도 가을바람 맞으며 목구멍에서 톡톡 터지는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행복하다 느끼는 인생이 있지 않나. 서로 물고 빨고 하지 않더라도 그냥 가끔 손 한번 잡아주는 것만으로 묵묵한 사랑을 느끼는 그런 인생이 있지 않나. 젤라토 아이스크림이 아니더라도 쮸쮸바 하나로도 소소한 기쁨을 느끼는 그런 인생이 있지 않나. 결코 특이하지 않은 인생을 별로 특이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사람들 속에 숨어서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존재로 말이다.


내가 겪었던 많은 일들이 평범한 일이 아니란 것을 알아서, 내 삶의 모양새가 보통의 모양새가 아니라서 수치스러웠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었다. 내 무의식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의 사회적인 자아는 그랬다. 그런 일들이 기록된 책을 가까운 누구에게 주고 싶었겠는가. 다만 나는 나의 경험을 떠나보내고 싶었을 뿐이다.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흘려보내고 싶었을 뿐, 원대한 목표 따위가, 예리하거나 총명한 지성 따위가 있을 리가 있나. 나는 그랬다. 기쁘고 뿌듯하고 나 자신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다. 그런 감정들의 밑바닥 깊은 곳에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수치심이 있었다.











주치의는 나를 특별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나를 특이하다 느낀다. 인생의 기쁜 순간에 온전히 기쁘지 못하고 온전히 감동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내 안에 자리한 수치심 때문이다. 스스로를 특이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수치심 때문이다. 평범함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내가 쓴 책을 두 번이나 읽으며 다시금 들었던 생각은 정말로 잘해온 나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친정엄마와 그 형제들이 내 안에 힘껏 박아놓은 수치심의 말뚝을 이제는 뽑아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마자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마치 애착 인형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나는 울었다. 이제 낡고 꼬질꼬질한 애착 인형을, 아니 낡은 말뚝을 뽑아 흘러가는 강물에 던져버려야 할 때다.





한 권의 책을 낸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인간이 된다는 말이 있다. 새로운 여명이 찾아오고 있다. 그동안 숱하게 찾아왔던 여명이 아니라 새로운 여명이다. 이 특별한 여명을 온 마음으로 두 팔 벌려 환영하기로 했다. 나는 수치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특별하다. 고유한 나라서 특별하다. 그래서 선택받기보다 선택하기를 선택할 것이며 누군가의 무엇이 아니라 나만의 나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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