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문학을 닮고 싶다.

메이저가 아니라 마이너로 살겠습니다.

by 흔들리는 민들레


하나의 유기체

하나의 유기체


한 장 한 장, 종이가 쌓여간다. 한 장들이 모여 열 장이 되고 열 장이 모여 스무 장이 된다. 스무 장이 모여 서른 장이 되고 마흔 장이 되고 백 장이 되고 이 백장, 삼백 장이 된다. 그리고 삼백장은 한 권의 책이 된다.


집에 책이 많아서 이제 그만 사야지를 매일 중얼거린다. 이사할 때 엄청 많이 버렸는데 아직도 많다. 더 이상 둘 곳이 없는데도 좋은 책을 만나면 아직도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든다.


모든 책은 한 인간의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서 글이 쓰여지고 그 글이 책으로 만들어질 때 책은 자기만의 운명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책을 단순한 종이묶음으로 느끼기보다 자기만의 에너지를 가진 유기체적인 존재로 느낀다.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그리고 그 유기체는 변하지 않는 항상성을 가지고 내 안에서 늘 함께한다. 실에 있는 책장 앞을 지날 때마다 서점에 들어갔을 때 나는 향기, 오래된 도서관에 방문했을 때 나는 향기가 난다. 그 향기는 힘들고 괴로운 삶의 한가운데에서 중심을 잃지 않도록 손을 잡아준다.







변하지 않는 것


변하지 않는 것, 예술.


모든 것들은 변했다. 내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떠나거나 사라져 갔고, 내가 자람에 따라 영원할 것 같았던 생각이나 감정들도 변했다. 어릴 적 매일 다니던 길들이 어느 날 보니 완전히 달라져있기도 했고 어릴 적 사랑했던 친구가 어느 날 보니 다른 사람이 되어있기도 했다. 십 년간 다니던 빵집이 문을 닫고 그 자리에 떡집이 생기기도 했고 육 년간 다니던 채소가게가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카페가 생기기도 했다. 좋아했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떠나기도 했고, 마음을 나누던 동료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떠나기도 했다.


어릴 때 살던 동네에 가게 되었을 때 어떻게든 작은 추억 하나쯤 떠올려보려 하지만 모든 게 너무 많이 변해버려서 어떤 추억도 떠오르지 않는다. 새로워진 건물과 길들은 마치 그것이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양 시치미를 떼고 내게 물어왔다. " 넌 누구니?"


나는 늘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데, 하늘은 매일 똑같은 하늘인 것 같은데 모든 것이 변했고 달라져가는 게 슬프고 외로웠다. 그런 내 곁에 있어준 것은 책이었다. 책은, 언제나 같았다. 오늘은 58쪽이었다가 내일은 256쪽이 아니라 58쪽은 항상 58쪽이었고 256쪽은 항상 256쪽이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책은 언제나 같은 말을 했다. 내가 버리기 전에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책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모든 예술이 그랬다.






변하지 않는 문학



아름다운 문학처럼.


세상의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변질되고 왜곡되어 가도 문학작품만큼은 그대로다. 예술만큼은 거짓말을 하지도 표리부동하지도 않는다. 하나의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거나 편견이나 차별을 갖지도 않는다. 예술 속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며 모든 인간의 고유성은 은유와 상징을 통해 드러난다. 타의에 의해 벗겨지는 것이 아니라 자의에 의해 공개된다. 예술가들은 타의가 아니라 자의로서 존재하고 기능하고 싶어 한다. 예술가들의 그런 욕구가 수세기에 걸쳐 작품으로 표현되어 왔다.


내게 문학은 부모이고 예술은 구이다. 문학은 세상의 기준이나 속도가 아닌 나만의 속도와 나만의 기준을 탐색할 수 있게 해 주며 한 장 한 장 쌓아나가는 삶의 태도를 갖게 해 준다. 부족하고 미숙하지만 그래서 때로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고 열등감을 넘어 부적절감까지 느낄 때 를 지켜준다. 남들이 궁금해하지 않는 나의 어떤 면을 궁금해한다.


문학을 닮고 싶다. 나만의 속도와 나만의 기준으로 고유하게 한 장 한 장 써 나가면서 학처럼 살아가고 싶다. 사랑하면 닮는다는데 얼마나 닮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검은 밤이 푸른 새벽이 되었다. 오늘은 얼마나 문학과 닮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