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즘적인 부모와 배우자와 살면서 정말 고통스러웠고 힘들었다. 불면증도 있었고 집이라는 공간이 늘 불편하고 불안했다. 몇십 년간 양육으로 키워진 느낌이 아니라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것이 아니라 괴롭힘을 당하는 느낌이었다.행복하고 안정적인 느낌이 아니라 불안했다. 가족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 느낌이었다. 혼란스러웠다. 나의 이런 감정들을 심리학의 애착이론에서는 혼란형 애착이라고 했다.
나는 공부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철학을 시작으로 사회학, 여성학, 심리학을 팠다.애착이론을 시작으로 대상관계이론, 인간중심 상담, 아들러의 이론, 프로이트, 융, 게슈탈트, 등등을 파고 또 팠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소화제를 먹은 것 같은 개운한 느낌은 아직까지 받은 적이 없다.그래서 계속 파는 중이다.
자아도취적인 남편의 심리치료
자아도취적인 남편의 심리치료
우울증 치료를 하면서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됐다.그리고 성장했다. 불면증은 사라졌고, 공부와 글쓰기는 계속됐다. 그리고 쨘,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지만 삶은 계속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성장 중이다.
많이 성장했지만 아직도 나의 깊은 곳에는 죄책감과 수치심이 자리 잡고 있다. 나도 모르게 그 감정들을 자주 꺼내 사용한다는 걸 알고 있고, 지켜보고 있다.성장했다고 해서 그 감정들이 흔적도 없이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다. 해피엔딩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만 있다.극을 끝내기 위한 장치로 말이다.
내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깊은 상처를 받았다는 걸 우울증 치료를 통해 알게 되었고 공부 중이지만 미완성이다. 친정엄마와 연락을 끊었지만 아직도 깊은 곳에서는 죄책감이 건드려진다.죄책감이 건드려지면 이내 분노가 올라온다.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나하는 마음이 든다.
자아도취적인 남편은 자기가 자아도취적이라는 걸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인의 어떤 점이 나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며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부재했던 것들에 대해 인정한다. 또 현재 자기 내적인 요인으로 행복하지 않음도 인정한다. 그리고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나의 행복
나의 행복
그토록 상담현장에 나타나기 힘들다는 나르시즘적인 사람이 상담을 받기 시작한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경계설정> 때문이다.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서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는 나의 작업(?)을 통해 그는 자신의 것을 내 것이라고 규정짓지 못하게 되었다. 자기의 불행은 아내 때문도, 아이들 때문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둘째, <나의 행복> 때문이다.
나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고 단단해졌다.더 생동감 있게 현재를 살게 되었다.환경이 전혀 바뀌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됐다. 작은 기쁨들을 발견하고 거기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고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느끼면서 살 수 있게 됐다.
무엇을 가짐으로 느끼는 행복이 아니었다. 또 어떤 사람이 되어서의 행복도 아니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았다. 남편은 이런 나를 곁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나처럼 행복하고 단단해지고 싶다고 했다.
셋째, 그 내면의 욕구 때문이다.
분명 자신도 불편했을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와 공허, 무력감들에 대해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름 붙일 수 없었던 감정들이 아내를 보면서 건드려졌을 것이다. 그것이 그를 한 발 내딛게 했을 거라 생각한다.
타인은 더이상 내게 상처를 줄 수 없다.
타인은 더 이상 내게 상처를 줄 수 없다.
인간은 완성일 수 없다.언제까지고 성장해 나가야 한다. 자격이나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고 완성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작은 관문일 뿐이다. 나는 인간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한다. 살아있는 한 영원히 불완전한 상태이며 완전한 상태는 죽음뿐이라고 생각한다.미완성은 불완전함이다. 불완전함에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나는 불완전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가능성을 가진 채로 영원히불완전,미완성일 것이다.
주변의 나르시시스트와 손절한다고 해서 내 인생에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작은 고통 1이 사라진 것일 뿐, 언제 어느 때에 우리에게는 어떤 고통이 또다시 찾아올는지 모른다. 분명 그들은 타인에게 고통을 준다. 그러나 그들이 사라진다고 내 삶이 완벽히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제 그들이 내게 주는 고통보다, 그 자신이 자신에게 주는 고통이 더 크게 보인다. 그들이 주는 고통이 이제 내 고통일 수 없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더 이상 그들에게 고통받지 않는다. 내가 진정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타인이 내게 주는 고통이 아니라 내가 내게 주는 고통이다. 나 자신은 모든 순간 언제나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적은 바로 나이며, 가장 큰 동반자도 나이다. 타인은 더 이상나를 파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