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지 않은 곳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똑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책은 작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영구 임대아파트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을 때 만났던 한 아이가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아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상한 2015년 작이다.
이야기는 칠순의 나이에도 갈빗집에서 불판을 닦는 실질적 가장인 할머니와 직장에서 정리해고된 뒤 삶의 희망을 놓아 버린 백수 아빠랑 행운 임대아파트에 사는 16살 란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홀로 아기를 낳고 절망으로 목숨을 끊어버린 정아, 홀로 힘겹게 키운 정아를 보내고 딸이 낳은 아기를 키워야 하는 빌딩 청소노동자 옆집 아줌마, 조선족 불법체류자로 돈을 벌어야 하는 민성이, 청주분식집, 그리고 이들과는 전혀 다른 최고급 아파트에서 잘나가는 산부인과 딸로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는 클레어의 가려진 멍든 삶이 란이 주변의 모습들이다.
정부는 인구 감소를 걱정해 출산 장려 정책을 펼쳤다. 란이는 그런 기사를 볼 때면 피식 조소가 나왔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낳아 놓은 애들부터 죽지 않게 하란 말이야. 란이는 입을 앙다물며 구직 사이트에 들어갔다. 손 놓아 버리는 건 쉽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잘 살지는 못해도 꿋꿋이 살아 내고 싶었다. 24쪽
너무 일찍 엄마에게 버림받은 상처와 미혼모 정아 언니를 잃은 슬픔은 16살밖에 안된 소녀가 겨울방학 때 돈을 벌어서 나팔관 수술을 하려는 결심까지 하게 했다. 어린 란이에게 참 가혹하기만한 목표다.
할머니가 좌판에서 3만원 정도의 하루 일당을 주고 산 란이 패딩, 란이는 입고 가지 않는 걸로 마음을 정했다. 할머니가 왜 입고 가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 할머니가 어떻게 알겠는가. 추위라는 육체적인 고통보다 모멸이라는 마음의 고통이 더 중요한 것을 말이다. 32쪽
인간 사회에서 인간들이 만든 편견의 시선, 오랜 역사에서 아예 당연시 돼버린, 하지만 아주 몰지각한 인간들의 시선이다. 그런 차이를 만들면 우월해진다는 착각에 빠진 인간들이 이 사회 곳곳에서 떵떵거리며 살아간다. 우리 사회는 그런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그저 굽신거리는 것이 당연한 사회다. 슬프게도 아직 우리사회는 권력, 자리, 사회적 위치 등이 당연한 ‘권위’라 여기는 사고가 너무 깊이 뿌리박혀있다. 이제는 한층 더 성숙한 사회를 위해 그런 구태적 사고를 뛰어넘어야 한다. 권위나 체면이 중요한 게 아닌 진짜 참사람, 참일꾼이 존경받는 시대로 가야 한다.
마침 최근 읽은 다운증후군 화가 은혜씨 엄마의 말이 참 와닿았다. 장애 자식을 낳은 후 절망감에 빠졌을 때 '자신의 불행의 원인이 어떤 상황이 아닌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돌려서 그들을 바라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엄마로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는, 감히 흉내내기 힘든 깨달음이다. 은혜씨가 오랫동안 동굴 속에 갇혀있었던 이유도 그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풍족한 가정에서 공부 잘하고 예쁘기까지한 클레어가 란이에게 다가옴이 처음에는 낯설어보였지만, 클레어 부모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환경은 다르지만 내적 외로움의 공감이 있는 란이와 클레어가 좋은 친구가 되어가는 모습은 애틋하면서도 흐뭇해 보였다.
란이는 생각했다. 때리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주는 아빠와 때리지는 않지만 밥 한 톨 주지 않는 아빠 중에 어떤 아빠가 더 나을까? 너무 어려워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클레어랑 페밀리 레스토랑에서 배불리 먹고도 반 이상이 남은 음식들을 보며 싸가서 할머니와 콩이에게 주고픈 란이의 마음에서도 가난에 드리워진 란이의 속깊음을 읽을 수 있다. (물론 필자는 가난과 상관없이 버려질 음식이 아까워서 포장해달라는 쪽이다.)
“명품 옷에 고급 아파트에, 그게 다 뭐람. 마음은 시궁창인데. 난 말이야. 돈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을 시궁창으로 만들지는 않을 거야. 내 부모처럼은 안 살 거야.”
자식을 사람이 아닌 사물로 대하는 부모한테서 자란 클레어는 다행히도 부모와는 전혀 다른 아이로 성장하고 있었다. 자신의 패딩을 입은 클레어를 보며
돈은 사람의 본질을 가린다. 본연의 모습을 검은색으로 덧칠해 아무 색도 아니게 만든다. 이제 클레어의 진짜 모습을 알겠다고 란이는 생각했다. 148쪽
또 란이는 민성이와 자신이 같은 처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기만이었음을 느낀다. 민성이 말대로 집도 있고, 할머니도 있고 대한민국 국적도 있으니까. 대한민국이 나가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국적, 우리는 너무도 당연해서 불법체류를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불안한 절실함에 대해선 외면하고 살고들 있다. 생각해보면 조선족인 민성이의 선조들도 우리 조상이었고, 지금까지도 고려인으로 조선족으로 이국땅에서 처절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불법체류를 미끼 삼아 부려먹고 임금을 체불하고, 밀린 급여를 달라고 하면 불법체류자로 신고한다고 협박하거나 신고해버리는 악덕 업주들이 아직도 사회 곳곳에 늘려 있다. 살기 위해 쫓기듯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조상, 아니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 속에서 이들도 역사의 희생자들이다. 불법을 용납하라는 게 아니다. 적어도 그들의 취약한 약점을 이용하여 돈을 벌려는 짓은 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다.
자신을 속이고 아빠에게 매맞게 한 파수꾼 집을 찾아간 클레어는 사람이 살기 힘든 집안과 팔에 링거를 달고 있는 아이를 본 후, 스스로를 돌아본다.
“ 내가 만약에 저런 환경이라면, 그러니까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 일을 할 수 없는 할머니와 보살펴 줘야 하는 어린애와 같이 산다면, 그래서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면, 과연 내가 양심 팔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야.” “~ 내가 여태까지 양심을 지키고 살았다면 그거 내가 양심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1학년 때 반에 체육복을 훔친 애가 있었어. 나는 그 애가 너무 싫었어. 고작 만 얼마 하는 체육복 때문에 도둑질을 했으니까. 100만원도 아니고 10만원도 아니고 고작 1, 2만 원 때문에 그런 짓을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어. 그런데 말이야, 나는 한 번도 그런 상황에 처해 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아까 그 집을 나오면서 들었어.” 154쪽
그런 클레어를 보며 란이도 함께 성장한다.
한 사람을 알게 된다는 건 그 사람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음악을 좋아하고, 어떤 연예인을 좋아하는지를 알게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과 똑같이 상처받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거라고.
누군가에게는 고작 1, 2만원이 아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1, 2천원 아니 1, 2백원을 아끼기 위해 마트에서 편의점에서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며 살아간다. 그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는 이들이 그 모습을 멸시가 아닌 포용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 사회는 좀 더 따뜻해지는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진정한 변화는 이렇게 작은 부분부터다.
부자들은 혼자서도 살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서로 돕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살기 위해 식탁 의자를 내어 주고, 숟가락을 쥐여 준다. 란이는 그게 참 슬펐고, 한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59쪽
행복슈퍼 할아버지는 란이가 물건을 사면 늘 덤으로 얹어준다. 청주 분식의 청주댁은 그냥 라면을 시켰는데도 참치라면을, 김밥 한 줄을 더 말아준다. 아빠에게 반복되는 폭력을 당하는 클레어가 위험해 보여 란이는 집으로 데려오고, 엄마가 보호소에 갇힌 후 찜질방에서 지내는 민성이를 란이네는 당연하게 품어준다.
란이의 눈에 할머니나, 옆집 아줌마나, 청주댁은 불쌍한 사람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찬 바람을 맞으며 하루 종일 갈비 찌꺼기를 닦아내고, 빌딩 청소를 하고, 김밥을 싸는 모습이, 그러나 이제 알았다. 먹고살기 위해 하루하루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내는 것만큼 대단한 일은 없다는 걸,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열심히 사는 사람을 불쌍하게 여길 자격 같은 건 없다. 182쪽
이 책을 읽는 내내 우리 딸들의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란이의 삶과 다르지 않은, 참 많이 닮은 우리 딸들의 그 시절들. 특히 울 큰딸 (지금은 개명했지만) 어릴 적 이름도 란이였다. 누구보다 꿈 많고 호기심 많은 우리 란이 어릴 적 모습들이, 그 꿈만큼 해줄 수 없어서 지금도 마음 구석에 늘 자리하고 있는 엄마로서의 아픔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머릿속을 뱅뱅 맴돌았다.
창고 같은 집-햇볕이 들어오지 않아 두터운 곰팡이 꽃이 온 벽을 감싸던 집-1981년에 준공한 오래된 낡은 아파트 등. 이사를 거듭하며 초중고를 보낸 내 새끼들의 기죽은 아픔들과 불안 속에서 조마조마하며 두 딸을 지키고 안전하게 키우기 위해 속울음 많이 울었던 나의 40대와 함께 읽었다. 다행히 정말 다행히 내 새끼들은 건강하고 올곧게 잘 자랐다. 초라한 집에 살면서 어릴 때는 나쁜 친구들 시선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커갈수록 울딸들은 당당해져갔다. 그 가운데는 책이 있었다. 집은 비록 초라하지만 방 가득, 거실 가득 채워져 있는 책들이 우리 딸들에게는 그나마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이었지 않나 싶다. 세속의 출세와는 전혀 거리가 멀지만 바른 세상을 위해 당차게 활동하며 주변을 살피는 마음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어려움 속에서지만 좋은 책들이 늘 함께 있었고 그 책들을 통해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바르게 녹여 세상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단한 자아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조금만 눈을 돌리면 보이는, 평범해 보이지만 따뜻한 시선이 필요한,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네 이웃들의 삶을 담은 이야기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똑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