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통하고 까무잡잡한 피부.
평범한 가방에 크로스로 도시락 가방을 메고 다는 던
한나. 얼마나 정성껏 묶었는지 머리카락 하나 삐져나오지 않게 정리된 헤어스타일.
늘 평안한 얼굴로 학교에 와서는 즐겁게 생활한다.
"한나야 우리 학교 끝나고 놀러 가자"
한나가 대답한다 "나 집에 갈 거야~"
한나랑 친해지고 싶었다.
한나는 나와 다르게 너무나 안정적이었다.
특별히 감정선이 예민한 아이도 아니고 욕심을 부리는 친구가 아니었다. 모든 일들을 문제화시키지 않는 게
한나의 장점이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면이었다.
편견을 가질법한 일들도 이상하게 한나에게 오면 아무 일도 아니게 되는 신기한 재주가 있는 친구였다.
그런면들이 언제나 늘 부러웠다.
한나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단 생각을 늘 했다.
알짱 되었다. 인연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한나야~!!"
그럴 때마다 한나는 특유의 안정된 미소와 행동으로
마주했다.
중학교 시절. 감정선이 예민한 나는 너무 힘든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늘 마음이 불안했고 받지도 않아도 될 스트레스로 사는 것마저 달갑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내 눈에 보이는 한나.
결국 중2 때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교회를 나와
한나네 교회로 가게 되었다.
한나와 함께하면 내 마음이 좀 나아질까 해서.
그렇게 한나와는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고.
나의 모든 일에는 한나가 있었다.
"한나야. 쇼핑하러 가자"
넉넉지 않은 돈으로 작은 티 하나 사고
떡볶이만 먹은 지 3년 이상이 되는 것 같다.
한나도 떡볶이를 원하는 줄 알았는데. 그 오랜 기간을 아무 말 없이 먹어주었던 한나.
우리 동네서 냉이도 캐고 미나리도 뜯자며 귀찮아하는 너를 데려와 냉이랑 비슷한 풀들만 잔뜩 뜯어 보냈다.
외할머니가 보시고는 어디서 이렇게 풀들을 캐왔냐고 한 움큼 버리셨다고 했을 때 난 사실 재밌기만 했다.
장작 모아놓고 군고구마를 구워 먹자고 불을 피웠을 때도 나만 즐거웠던 것 같다.
"난 사실은 삼겹살을 포일에 싼 걸 기대했는데.."
한나의 작은 목소리..
난 뭐든 그냥 너랑 함께하는 게 좋았다.
버스 안에서 즐겁게 얘기하는 우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우리를 째려보던 불량배 언니를 보고서도 사실 난 무섭지 않았다.
너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테고 나도 너를 버리지 않아. 우린 서로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의 학창 시절은 무조건 한나였다.
성인이 되고 많은 것이 변해가고 있었다.
우린 마주한 현실 속에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한나는 재정난에 허덕이는 부모님을 보면서 점점 마음이 차가워져 갔고.
결국 가족과의 헤어짐을 경험하며 늘 가지고 있던 평정심이 깨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본성이 깬 걸까 아니면 스스로 선택한 걸까.
"진영아. 넌 친구가 잘살면 그 친구와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
난 고민 없이 대답했다.
"응. 서로 이해하면 되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 건.
벌써 닫혀버린 줄 알면서도 부인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인연이 되기 싫어 모르는척했다.
내게 비난을 해도. 나를 피해도.
이 시기가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나도 너무 아픈 20대였고 한나도 너무 아픈 20대였다.
우린 너무 버거웠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너의 눈을 보니 아픔과 슬픔, 원망으로 가득 차 보였다.
'그래. 너도 많이 아프구나..'
그렇게 서로가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우린 둘 다 아이 엄마가 되었다.
가끔 카톡 프사를 보면 참 후덕해진 너의 모습이 어쩐지 좋아 보인다.
타지에서 아이를 키우며 참 힘든 일도 많을 텐데..
잘 견디고 있구나.
10년쯤 지나니 아픔도 추억이고 마음의 짐도 많이 내려놓게 돼서 널 다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넌 나의 또 다른 가족이었다.
우리의 20대가 아프지 않았다면 지금은 어땠을까.
아직도 둘도 없는 친구로 남았을까?
길게 백세로 봤을 때 어쩌면 서로 모르는 척하는 사이가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하늘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그때를 난 깨버리고 나왔다.
다른 공기를 마시고 다른 나무를 보며 또 다른 숲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때 그대로 지내고 있었다면 지금의 풍요로움도 또 다른 행복도 다른 시선도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너무 내 안에 갇혀 살았구나. 하늘엔 뭉게구름만 있는 줄 알았다.
먹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고 나니 하늘은 더없이 맑았고 땅엔 새싹이 돋았다.
내가 좋아하는 라일락이 여기저기 피어 있고 미쳐 보지 못했던 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인연이 오고 가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나도 조금씩 이해하고 성숙해지는 것 같다.
좀 아쉬운 건 인연에 대해. 사람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버릇이 들고 말았다.
붙잡고 있지 않기로 했다. 놓아주기로 했다. 그게 나와 너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무나 무수히 많은 기회를 놓치며 붙잡고 살길만을 바랬다. 그것도 나의 욕심이고 오만함이란 걸 알았다.
꿈에서 깨고 나니 헛헛함이 몰려온다. 다시 채워보려 노력해본다.
우린 다시 붙여놓을 수 없는 인연이 되었지만 가끔 잘 지내냐는 안부 정도 물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정도 노력이면 됐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흘러가게 되어 있다.
기쁨과 슬픔 모두 나를 스쳐 지나가고 때론 깊게 안주해 있으면서 또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깨달았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