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 생텍쥐베리
이 책은 생텍쥐베리가 우편 비행기의 조종석에서 바라본 세상의 모습, 인간의 삶, 그와 동료들의 조난의 경험을 쓴 삶에 대한 희망의 기록이다.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말이 있다. 짙게 옻칠을 한 까만색을 말하는데, 온통 깜깜해서 방향이고 사물이고 분간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적이 있는지. '그런 적'이란 것은 두 가지 경우를 의미한다. 눈으로 보이는 빛의 분별이 안되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각의 상태가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지금 처한 상황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상황이 타개되거나 조금도 나아질 기미도 없는 막막한 상태.
'그런 적'이 있는지.
나는 둘 다 몇 번의 경험이 있다. 첫 번째는 경북 군위 어느 깊은 산속의 군 훈련장에서 맞이 한 새벽 2시의 불침번 때였다. 밖으로 나왔는데 사위 분간이 안되고 금방 나온 문을 향해 뒤돌았는데도 그 문의 방향을 정확히 짚지 못했다. 빛이 나는 것이라고는 오직 밤하늘의 별뿐.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었는데도 '아, 저게 은하수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너무 무서워 나도 모르게 옆 동기의 손을 잡았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의 순간은. 어느 것을 소개해야 좋을지 고민스럽다. 그중 하나를 이야기해보자면,
군에서 전역을 했을 때의 나이가 서른하나였다. 결혼은 했고 큰아이를 낳았고, 전역을 하고서 돌아갈 집도 없었고 당장 내일부터 출근할 곳도 없었던 때. 하던 공부를 다시 해보겠다며 호기롭게 이야기했지만 정작 나는 취업원서를 여기저기 넣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른하나'의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부담스러울 나이도 아니었지만, 취업은 이십 대가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사회와 나를 가로막는 벽처럼 느껴질 때였다. 막막하고 막막해서 길거리를 터벅터벅 걷고는 했던 그때의 기억.
우리는 그런 '칠흑 같은 어둠'을 겪고 나면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기도 하고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 생텍쥐페리는 우편 비행기의 조종석에서 바라본 세상의 모습, 인간의 삶, 그와 동료들의 조난의 경험을 썼다. 이 책은 생텍쥐베리가 1926년 아프리카 프랑스 남부 툴루즈와 아프리카 서부 세네갈의 다카르 간의 연락을 담당하는 라테코에르 회사의 신참 노선 조종사로 막 입사하고 아프리카 우편 비행기의 첫 출항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자전적 소설이다.
'칠흑 같은 어둠'을 마주하며 대지인지 바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절대 고독의 순간에 그는 대지와 하늘의 빛깔, 바다 위로 남겨지는 바람의 흔적, 석양 무렵의 황금빛 구름에 대하여 깊이 생각했다.(34쪽) 리비아 사막에서 그는 사흘간 고립되었다. 그에게 닥친 절망이 나무 한그루 없는 사막의 모래 속에 파묻혀 작렬하는 해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과 같을 때, 그는 포기의 순간을 이겨내고 신기루를 쫓아내며 눈앞의 걸음을 떼었다.
하늘 위의 비행기와 대지 사이의 공간만큼이나 먼 거리를 비행하던 생텍쥐베리는 이 자전적 소설의 제목을 왜 ‘인간의 대지’ (Terre des Hommes)라고 했을까. 비행사로서의 고독, 외로움, 두려움,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진 시선으로 하늘에서 내려다 본 인간의 삶의 모습을 말하고 싶었을까.
우편행낭과 함께하는 비행기 안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며 그가 느낀 인간의 삶, 그와 동료가 겪은 조난의 경험을 통하여 '삶의 희망'과 '책임지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신참 비행사로서 출정 전날, 같은 노선을 비행했던 기요메로부터 설명을 듣기 위해 그를 찾는다. 스페인을 통과하여 비행하는 노선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해 줄 것을 기대한 그에게 기요메는 세 그루의 오렌지 나무와 산기슭에 자리 잡은 부부의 소소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드디어 동이 트고 우편 행낭과 함께 출발하는 처녀비행. 이후 그의 비행은 바다를 향하여 추락할 뻔한 위기와 별을 향한 비행 사이를 오간다. 폭풍우 치는 하늘을 가르며 산, 바다, 폭우라는 자연의 신과 싸우며 조종사의 고독은 별이 되어 반짝인다.
조종사인 그와 동료들에게 있어 무전의 침묵은 곧 죽음을 뜻한다. 그의 동료 메르모즈와 기요메. 사막과 산, 밤, 바다를 개척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던 메르모즈는 10분 동안의 침묵과 함께 안데스산맥에서 마지막 비행을 끝으로 사라졌다.
기요메.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동료 기요메는 안데스산맥을 비행하다가 실종된다. 50시간의 사투 끝에 기요메는 돌아왔다. 안데스산맥에서 마주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는 아내에게 전해질 보험증서를 떠올린다. 내가 지금 삶을 포기하고 실종된다면 보험증서는 전해질 테지. 그러나 그가 실종으로 처리되려면 4년의 실종기간이 지나야 했다. 그 사이 아내가 겪을 일을 생각하면서 기요메는 가족과 삶에 대한 책임감으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 돌아왔다.
쥐비 곶에서 공항 책임자로 있었던 때. 그곳에서 ‘나를 비행기에 숨겨 말라케치까지 데려가달라’는 노예(바르크)를 만난다. 기다리다 지쳐 초라한 행복에 머무르는 다른 이들과 달리, 노예 상태에 안주하지 않은 바르크(115쪽)였다. 그는 바르크를 무어인으로부터 2만 프랑에 사서 그에게 자유를 선물한다. 바르크가 비행기에서 내린다 해도 한 푼 없이 굶어죽을 것이 걱정되어 그의 동료들은 1000프랑을 주었다. 1000프랑의 돈으로 바르크가 선택한 것은 사람 사이의 삶이었다. 바르크는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를 타기까지의 한나절의 시간 동안 그의 동료들이 건네준 1000프랑의 돈으로 선물을 모두 사서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베푼다. 그가 베푼 것은 사람들과 엮인 사람이 되기 위한 자유로운 사람으로서의 행동이었다. 돈이 아닌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선택의 가치를 생떽쥐베리는 그렇게 알아차렸다.
리비아의 사막 한가운데 불시착 한 그와 동료 프레보는 사흘간 사막을 헤맸다. 오렌지 하나와 마시지 못할 물 2리터를 들고 사막을 헤매면서 끝없는 신기루의 허상에 시달린다. 삶의 포기와 고통의 인내를 오가다가 드디어는 구조되는 이야기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였다. 읽는 내내 그의 입안에 말라붙은 침의 꼴깍거림조차 그대로 전해지는 대단한 묘사가 이어진다. 그가 끝까지 놓지 않은 삶에 대한 의지를 보면서 삶에 대한 희망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느껴진다.
희망의 의미는 막막한 사막 속에서 허상일지 아닐지 모르는 200미터 건너의 신기루를 쫓아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밤사이 얻어지는 몇 방울의 이슬에 매달리는 절실함이다.
지금과는 달리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비행기를 믿고 오로지 별빛과 지평선과 바다를 가늠하며 비행하는 조종사 삶은 매일 같이 죽음의 순간과 마주한다. 아차 하면 사라지는 무선의 얇은 신호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절망과 고뇌가 아니라 삶에 대한 책임과 깊은 애정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칠흑 같은 어둠'의 순간을 기억해보라고 했지만, 사실 우리는 매일같이 그런 순간을 마주하고 있지는 않은가. 반복되는 일상에서 내일도 오늘과 같지는 않을지 두렵고, 오늘 나를 차지해 버린 내 삶의 고민이 내일에도 단 한 발짝도 나아지지 않고 다시 만나는 그 느낌. 의미 없는 일상이 살아지는 듯하고 흘러가는 하루를 버텨낸 것과 같은 순간 말이다. 기한이 정하여 지지 않은 무기수가 내리꽂는 도형장의 곡괭이 같은 무한 반복의 형벌과 같은 삶. 나는 가끔 그런 삶의 순간을 느낄 때가 있다.
"(199쪽) 우리들은 해방되고 싶다. 곡괭이질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곡괭이질에서 하나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한다. 도형수를 모욕하는 도형수의 곡괭이질은 개척자를 위대하게 하는 개척자의 곡괭이질과 같지 않다. 도형장은 곡괭이질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있지 않다. ...도형장은 아무 의미 없는 곡괭이질이 행해지는 곳.... 우리는 도형장에서 탈출하고 싶다."
희망이라고는 없는 삶의 암흑 속을 떠올리며 이 책을 읽었다. 나만의 페르소나 속에 감춰두었든지 잊고 있었든지 했던 내 삶의 암흑 말이다. 그런 암흑을 떠올리며 읽은 책이었지만 곳곳에는 삶을 향한 희망의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비행기 날개 끝에서 세상을 향해 생존의 신호를 알리고 있는 전등처럼.
"(203쪽) 아무리 하찮은 역할이라도 우리가 우리의 역할을 인식하게 될 때,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다. 바로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평화롭게 살고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죽음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그린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 생떽쥐베리의 자전적 소설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말이 품은 그 넓고도 모호한 뜻은 무엇일까. 삶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떠올리며 한걸음 내딛는 것이 아닐까.
리비아의 사막에서 그는 잠시 손만 놓으면 끊어질 삶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고난을 함께하는 동료 프레보와 삶을 어깨에 걸머진 채로 그는 끝까지 동료를, 또 자신의 삶을, 가족의 삶을 책임진다. 그가 말하는 희망의 의미는 막막한 사막 속에서 허상일지 아닐지 모르는 200미터 건너의 신기루를 쫓아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밤사이 얻어지는 몇 방울의 이슬에 매달리는 절실함이다. 그는 19시간을 헤매다 마지막 남은 오렌지를 빨아먹으며 별똥별을 헤아리는 중에 행복을 느낀다. 그가 느끼는 행복은 절망의 바다에서 그가 기대는 한 뼘의 공간, 한 모금의 물이다.
'(146쪽) 발길을 돌리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그렇게 방향을 돌릴 때 나는 파멸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아내의 눈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 눈 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아내의 눈이 묻는다. ...
나는 대답한다! 나는 대답한다! 온 힘을 다해 대답하지만, 어둠 속으로 더 환하게 불길을 던질 수가 없다!'
"(161쪽) 모닥불 가까이 누워서 찬란한 그 과일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오렌지가 무엇인지 모른다.' 나는 또한 이런 생각도 한다. '우리들은 죽음을 면할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그 확신이 내게서 기쁨을 앗아가지는 못한다. 내가 손에 움켜쥔 이 반쪽의 오렌지가 내 생애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를 가져다준다.' 나는 등을 대고 누워 오렌지를 빨아먹으며 별똥별을 헤아린다. 단 1분일지라도 난 여기서 무한히 행복하다.' 우리가 질서를 지키며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가 그 안에 스스로 갇혀보지 않으면 가늠할 수 없다."
생텍쥐베리가 이야기하는 삶에 대한 희망, 삶에 대한 책임은 거창하거나 화려하거나 멋진 무엇이 아니다. ‘칠흑 같은 어둠’을 사는 삶 속에서 한줌 희망으로 단 한 발 내딛는 것. 오늘 내리찍는 곡괭이질을 조금 더 의미 있게 하는 것. 도형수의 곡괭이질이 아니라 개척자의 그것으로 바꾸는 것. 삶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조금 행복해지는 것이 생떽쥐베리가 ‘칠흑 같은 암흑’을 통과하는 우리에게 전하는 희망의 불빛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