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챗쏭 May 10. 2019

'스카이캐슬'을 꿈꾸는 세상을 향하여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그래요, 선생님,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아이였지요. 
가장 뛰어난 아이들이 불운을 만나는 일이 많지요.정말 슬프지 않습니까?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문학동네(215쪽)



1906년 출간된 '수레바퀴 아래서'는 놀랍도록 지금의 현실과 닮아 있다.


읽는 내내 한발자국도 지금과 다르지 않음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지금 아이들을 '수레바퀴' 아래로 내몰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반성과 함께. 


수 많은 한스 기벤라트가 여전히 우리 주위에 있다. 우리가 이 책을 깊게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아이들이 수레바퀴 아래서 한스 기벤라트의 창백하고 핏기없는 얼굴로 성적과 시험과 성공이 가장 중요한 세상 속에서 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한스 기벤라트'의 수레바퀴





한스 기벤라트는 슈바벤 지방의 재능있는 소년으로 주시험에 합격해서 슈트라가르트 신학교에 입학한다. 아버지와 학교와 마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한스는 밤늦게까지 램프 불빛 아래서 공부에 매달렸다. 한스가 시험에 합격하면 그가 좋아하는 한가로운 낚시를 즐기는 시간이 주어지리라 생각했다. 이제 아름답고 자유로운 여름날들이 그를 위로하고 유혹하리라.  그러나 시험에 합격한 한스를 기다린 것은 빈둥대고 수영하고 낚시하고 꿈을 꾸는 날들이 아니었다.



오, 한스 기벤라트! 축하한다. 진심으로 축하해.
신학교에서는 우선 히브리어에 시간과 힘을 쏟아야 해.
매일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정도 매달려보는 거야.
쉴 자격도 있고.
물론 이건 제안일 뿐이야.
모처럼 얻은 휴가일 텐데 망치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52쪽)




한스를 기다리는 수레바퀴는 이미 구르기 시작했다. 세상을 향해 구르는 수레바퀴는 아이가 꿈꾸는 한가로움을 헤아려주지 않는다. 


한스는 신학교에서 영혼의 친구 하일너를 만나지만 학교는 모범생 한스와 반항아 하일너가 어울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갈등을 겪던 한스는 재단사의 아들 힌딩거의 죽음을 겪으며 수레바퀴를 벗어나고 싶어한다. 한스는 결국 신경쇠약으로 집에 돌아온다. 기계공이 되어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이룰 수 있는 행복을 찾지만, 현실에서도 그렇듯 소설 속에서의 해피엔딩은 없었다.





'헤르만 헤세'가 남긴 현재형의 물음




1906년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유년시절을 바탕으로 자전적 이야기로 쓴 '수레바퀴 아래서'는 놀랍도록 요즘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읽는 내내 놀라움에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그 때에도 아이에게 이랬단 말인가 하는 과거형의 놀라움인지, 아니면 요즘의 현실이 그 때로부터 여전함에 놀라야 하는 현재형의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빼앗고 꺾어버린 사춘기 소년의 모습을 우리는 여전히 곁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춘기 소년의 아버지로서의 내게 그것은 현재형의 물음으로 남았다.




그들 중 아무도 소년의 여윈 얼굴에 나타난 당혹스러운 미소 뒤에 물에 빠져 가라앉는 영혼이 아파하고 있으며, 그 영혼이 두려움과 절망에 차 죽어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도 아버지와 몇몇 교사의 야만적인 공명심과 학교가 이 연약한 존재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고 가장 위태로운 소년 시절에 왜 한스는 날마다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했을까? 


왜 그의 토끼를 빼앗고, 왜 라틴어 학교에서 동급생들을 일부러 멀리하게 만들고, 왜 낚시를 금지하고, 왜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고, 왜 하찮고 소모적인 명예욕을 추구하겠다는 공허하고 세속적인 이상을 그에게 심어주었을까? 왜 시험이 끝나고 힘들게 얻은 방학 때조차 푹 쉬게 하지 않았을까?


무지막지하게 몰아댄 망아지는 길에 쓰러져 이제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141쪽)





헤르만 헤세가 쓴 이 자전적 이야기 안에는 '하일러'를 통하여 건강한 삶의 모습을 일러두고 있다. 성적과 시험과 성공이 아니라 양심이 깨끗한지 더러운지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하일러(109쪽)는 훗날 갖가지 어리석은 기행을 더 저지르고 더 방황한 끝에 삶의 고뇌를 엄격하게 다스려 위대한 영웅은 아니지만 어엿한 한 남자가 되었다(137쪽). 


어쩌면 헤르만 헤세의 삶이 '한스 기벤라트'였다가 '하일러'의 삶으로 옮겨갔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스스로가 '한스'였던 삶을 결말내고, 그 삶과의 이별을 했다는 선언으로 읽혔다. 사춘기 소년의 삶을 세상의 수레바퀴로 이끌지 말라는 충고와 함께 말이다.


보통 소설 속 타인의 이야기는 현실을 빗대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소설은 타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이런 명제는 이 소설을 통하여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아이가 '한스 기벤라트'가 아니기만을, 그렇게 내몰고 있지 않기만을 간절하게 바랐다. 빗댄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들어낸 듯한 이 이야기가 1906년에 쓰였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비단 내 아이에게만 바란다고 될 일이 아니다.  우리 주위의 청소년들에게 물어보자.  '한스 기벤라트'의 창백하고 핏기 없는 얼굴이 그대들의 자화상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지금도 아이를 기다리는 세상의 수레바퀴는 어른들의 힘으로 굴러가고 있다. 이끌려가는 아이는 수치심도 아픔도 분노도 채 알지 못하며 주위 사람과 함께할 여유마저 갖지 못하고 어른으로 자란다. 여전히.





'스카이 캐슬'을 꿈꾸는 세상을 향하여





우리는 살아 본 어른의 삶으로 아이에게 삶의 공식을 쉽게 강요한다. 나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어른이 가르쳐 준 공식대로만 살아지는가 말이다.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된 수 많은 경험들로 삶은 채워진다. 배우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겪고 고민하여 알게 된 삶의 방식이 외려 삶을 지탱하고 풍요롭게 한다. 강요하여 가르친 꽉 짜여진 삶의 스케줄보다 비워두고 채워가야할 삶의 공백이 더 의미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 지점이 작가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책을 통하여 '스카이 캐슬'에 광분하는 현재의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그렇게 아이가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생각하기를 바란다. 1등을 하기 위해 목을 매는 공부를 하기보다 '더 방황한 끝에 삶의 고뇌를 엄격하게 다스려 위대한 영웅은 아니지만 어엿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럼에도 세상의 수레바퀴 저 앞에서 내 아이가 앞서 나가기를 바라는 욕심이 들 때도 있다. 아이는 여전히 내게 낚시를 해도 될 것인가 묻고 있고 나는 조바심을 낸다. 그러나 정작 조바심을 내야 할 것은, 경쟁의 수레바퀴에 이끌리느라 내 아이가 자신의 삶이 가는 길과 방향을 알지 못하는 것에 있다.  



작가가 들이미는 '한스 기벤라트'의 삶이 지금 우리 아이들의 삶이 아니냐고 묻는 질문에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한스 기벤라트'냐 '하일러'냐라고 윽박지른다면 생각의 추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아이들에게 '스카이 캐슬'을 권하는 어른들에게 던지는 질문의 의미가 그렇다.


우리가 적어도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만난 '불운'이 되는 어른이어서는 안되지 않을까. 



이 책은 덮고 나서야 길게 생각 나는 것으로 쓰여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말의 온도는 몇 도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