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과 독후감 어디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 한수희
할 수 있는 것과 이제는 더 하고자 마음먹기 어려운 일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나이40이 넘어가면서 드는 한가지 슬픈 생각은 바라는 것 중에 이룰 수 있는 것이 하나 둘 사라짐에 관한 것이다. 외국어를 능숙하게 해서 원서로 된 책을 읽어 볼 수 있다거나 영화를 자막 없이 본다거나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은 나의 모습이나 사진을 제대로 찍는 나를 만나는 일. 배움이나 능력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원이 있는 멋진 2층 집에서 나만의 서재를 갖는 꿈이나 할리 데이빗슨을 타고 친구와 7번 국도를 달려보는 일이라거나.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어려움의 강도가 더욱 세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번은 영어공부를 해본답시고 토플 책을 꺼내 든 적이 있다. 단어를 새로 외워야 했고 어려운 문장을 해석하느라 진도는 더뎠다. 무엇보다 영어를 공부하려면 단단하게 굳어진 내 생활의 스케줄을 깨뜨려 꾸준히 공부할 시간을 만들어 넣어야 하는데, 그것은 내 일상의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과 같았다. 퇴근 후 약속 자리가 많은 생활도 아니고 그렇다고 운동을 안하거나 책 읽는 시간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쥐어 짜 보려니 결국에는 집에 와서 식구들과 같이 밥먹고 이야기 나누는 몇 시간을 지우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기’라고 써 넣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살아야할까.
이십대나 삼십대라면 어디 한번 해볼까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겠지만 이제는 그런 각오조차 생기지 않는다. 삶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린 것은 아닐까. 무언가를 새로 한다는 것은 그렇게 무리를 하면서 무언가를 얻어 보려 아등바등해야 하는 것처럼 다가 왔다.
삶은 여전히 시시콜콜한 반복의 쳇바퀴를 돌고 있다. 할 수 있는 것과 이제는 더 하고자 마음먹기 어려운 일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나는 ‘오늘 하루의 행복을 꿈꾸며 산다’는 말을 언젠가부터 ‘내일의 거창한 무언가를 더 이상은 꿈꾸지 않는다는 말’을 대신하여 쓰고 있다. 나이 40이 되어 느껴진다는 안정감은 그런 포기와 체념과 타협을 현명하게 내 삶에 받아들이는 또다른 모습이다.
이 책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작가, 한수희의 책이다. "시시콜콜함에의 집착은 어쩌면 퇴행이 아닐까. 나는 매일 매일의 쳇바퀴를 돌리느라 정작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5쪽)"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놓고는, 시시콜콜한 글로 대답을 한다.
한수희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는 평범한 나의 삶을 편안하게 살펴볼 수 있게 한다. 나 어떻게 살고 있지? 이렇게 살아가도 되나? 남들보다 한참 뒤처져 사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 같은 것은 이 책 어디에도 없다. “정신차리고 살아, 그렇게 살아서 되겠어” 하는 말이 아니라 “이렇게 살면 어때,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고 있으니 안심해” 하는 안도감이 이 책 곳곳에 깔려있다. 서점에 홍수를 이룬다는 자기계발서와는 정반대의 말을 건넨다.
한수희가 살면서 알게 되는 넉넉한 삶의 지혜와 같은 일들. 뻔한 말인 것 같고 주위를 둘러보면 쉽게 찾아 볼 만한 이야기는 ‘뭐 이런 걸 다 썼데’ 하는 것이 아니라, 읽어서 머리로 이해하는 말보다 먼저 전해오는 따뜻한 편안함으로 다가온다.
신기한 것은 다 알만한 이야기로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민해봤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말라고 한다.”에서 마침표를 찍었다면 자기계발서나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움직이는 것이다. 고민이 있을 때, 마음이 복잡하고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 나는 일단 집 밖으로 나와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걷기 시작한다.(17쪽)’며 고민 많은 순간 운동화 끈을 고쳐 묶고는 나를 걷게 한다.
한수희 작가가 집에서 글 쓰고 일하면서 집안일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세 시간 네 시간을 꼼짝 않고 집중을 하는 반듯한 전업 작가의 삶이었다면, 글쎄 나는 그의 글에 크게 공감하지 않았을 것이다. 산만함에 관대해진 모습으로 10분쯤 쓰다가 벌떡 일어나서 책꽂이를 정리하고 다시 돌아와서 5분쯤 쓰다가 벌떡 일어나 청소를 한다. 집안일과 업무를 한번에 오가며 하는 일타 쌍피의 스케줄이자 한수희식 워라밸(25쪽). 누구나 한번쯤 해보았음직 일들, 아니 지금도 수없이 반복하는 일상의 그런 일들을 함께 하는 작가의 글이란, 읽는 내내 넉넉한 미소와 함께 읽을 수 있다.
서점에 가보면 자기계발서가 잔뜩 있다. ‘이렇게 살아보세요’ 하면서 검증 받은 자신의 삶을 써 놓은 여러 책들이 있다. 그 사이로 한수희의 책은 나이 40이 넘은 아저씨의 삶으로 들어와 반짝인다. 내 삶을 리셋하고 다시 태어나리라 하는 마음을 주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는데 내 삶은 무엇인가 하고 비하하게 되지도 않는다. 하루 만보 이만보를 걸어야 하나 마음 먹게 하지도 않고, 그저 오늘 걷는 나의 걸음은 나름 그대로 의미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게 한다. '이번 생이 아니라면 다음 생을 기약하면 되지 뭐' 하는 마음으로 그저 묵묵하게 읽고 공감하고 내 주위를 살펴보게 된다. 책장이 넘어갈수록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책이 사람에게 위안과 위로를 전하는 매개체라면, 나는 이책이 최근에 내가 읽은 책 중에는 그 의미에 가장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은 아마도 나만의 특별한 경험일 수도 있다. 동갑내기 작가의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이야기다 보니 내게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수희 작가의 블로그 글을 보다가(그러고 보니 꽤 팬이었구나 내가.) 오랜 친구를 만나게 된다며 올린 카톡 대화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니 신세한탄을 다 들어 줄 각오를 하라는 이야기. 얼마나 웃었던지. 왜냐면 나도 그러고 사니까.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아는 한수희를 향해 한겹 더 깊게 만나고 온 느낌이다. 한수희를 아냐고? 물론 안다. 몇권의 그의 책을 읽은 독자로서 말이다. 그간 그의 책을 몇 권 읽으면서 나름 한수희라는 사람이 이렇겠구나 하면서 생긴 감이 있다. 이번 책을 읽으며 다시 만난 한수희는 역시 사람이 마흔이 넘으면 편안해지는 구나 싶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한수희는 이번 책은 힘을 빼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했는데, 산책을 함께 하며 나누는 이야기 같은 책이었다.
시시콜콜하지만 결코 시시콜콜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방법
"아등바등"이라는 말이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부사] 무엇을 이루려고 애를 쓰거나 우겨 대는 모양.
이 책은 정확히 그 반대를 말한다. 꼭 이루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하다가 못하면 그만이고. 굳이 애쓰고 우겨가며 살 필요가 뭐 있겠는가 하는 넉넉한 위로를 건넨다.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 먹은 요즘의 내 마음이 딱 이렇다. 나는 왜 쓰는 것일까. 무엇을 하려고 쓰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착!하고 들어맞는 열쇠를 발견한 느낌.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글은 그냥 쓰면 된다. 누가 읽어주건 말건, 누가 좋아하건 말건 그건 다음 문제다. 굳이 말하고 다닐 필요도 없다. 글은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 그게 그렇게 힘들면 안 하면 그만이다. 글 쓴다고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아니다.
글을 써서 책을 내고 싶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그런 욕심도 마음도 없었다. 그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내가 쓴 글이 내 안의 나를 잘 드러낼만한 힘을 가졌으면 좋겠고 지금의 내 생각과 느낌을, 또 감정을 잘 옮길 수 있다면 그 뿐이다. 바란다면 아이들이 나중에 내 글을 통해 몰랐던 나를 잘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정도.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내가 살아가는 것이 크게 못나지 않았음을 한수희는 공감해줄 것만 같다.
한수희가 전해 준 ‘숨의 길이’는 시시콜콜하게 사는 것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시시콜콜한 것 같지만 결코 시시콜콜하지 않게 다가온다.
아무리 멀어 보여도, 아무리 높아 보여도, 한번에 한걸음씩 옮기다 보면 언젠가는 그곳에 닿아 있겠구나. 그러니까 꾸준함의 힘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결국 꾸준함이라는 것은 무리하지 않는 것과 등을 맞대고 있다. 꾸준하게 오래 하려면 자기 속도를, 자기 한계를 잘 알아야 한다. 무리하면서 오래 할 수는 없다.
‘숨의 길이를 안다’라는 말은 비교와 극복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내가 ‘모르던 나’를 ‘알았다’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기 때문에 내 한계인 ‘1분의 숨’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다룸의 대상이 된다. 각자가 그 한계를 아는 것이 자기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중요하다는 점이다.
나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애쓸 일은 없다.
쓸데없이 애쓰지 않는다. 내 한계를 받아들인다. 내 페이스를 유지한다. 뭐든 천천히. 꾸준히 해나간다. 한번에 한걸음씩 옮기면 어려운 것은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무리하지 않는 것이다.
(77쪽부터 79쪽 중)
오래 곁에 두고 가끔 삶이 지치고 피곤할 때 읽는다는 생각도 없이 꺼내들고 죽 훑어가고 싶은 책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