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3일 금요일 갑진년 병자월 임신일 음력 12월 4일
아주 오래전에는 음악을 자주 듣고 다녔다. 휴대용 CD 플레이어를 들고 다녔고, 거기에 연결된 헤드셋을 착용하고 다녔다. MP3 파일을 다운로드하기보다는 관심 가는 음반 하나를 사서 전곡 반복으로 듣고 다니는 것을 선호했다. 당시 좋아하던 노래들은 대체로 누구의 어떤 음반에 수록되어 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요즘은 서태지 음반만 명확하게 기억하고, 트랙 순서를 온전히 기억하는 건 그중에도 8집밖에 없다. 나머지는 초반이다 후반이다 정도의 두루뭉술한 수준으로 기억하거나 그저 그 음반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아직도 내 방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오래된 삼익 디지털피아노 위에 그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의 음반이 나열되어 있다. 청년 시절의 엄마가 듣던 것부터 내가 중고 서점에서 사 온 것까지. 그러고 보면 10대 후반에는 중고 서점의 음반 코너를 구경하는 걸 즐겼던 것 같다.
물론 그건 다 언젠가의 이야기다. 현재와 닿아 있지 않은 시점의 이야기다. 20대 초중반의 많은 시간은 음악을 듣지 못하고 살았다. 그 열두 음의 멜로디에서 비롯된 정서 불안. 음악이 틀어져 있는 환경에서는 억누르기 힘든 감정이 솟구치고, 그걸 통제하느라 다른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때가 있었다. 무언가 작성하라고 해놓고 음악을 틀어주면 애써 노력하다가 결국엔 백지로 마무리하거나, 약간의 용기로 음악을 꺼줄 수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솟구치는 감정은 꽤나 파괴적인 것이었다. 그 당시의 나를 음악이 틀어져 있는 환경에 두고 챈 님 같은 사람이 특유의 시답잖은 농담 비스무리한 것을 던지면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태였다. 장르와 무관하게, 심지어는 클래식 같은 것조차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요즘은 많이 나아지긴 했다. 여전히 음악이 틀어져 있는 환경에서는 사고가 무뎌지는 경향이 있고, 특정 음악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편한 감각이 끓어오르려고 하긴 하지만 말이다. 내가 싫어하는 노래는 대체로 취향에 의한 것보다는 그것이 틀어져 있을 때 상황과 무관하게 차오르는 감정과 온몸에 느껴지기 시작하는 불쾌한 감각이 싫어서일 뿐이다. 이런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의 무뎌진 사고에 대해서 음악에 심취해 있느라 다른 게 잘 안 들어오는 거라고 판단하기도 하지만 그런 말들에 일일이 대응해 주기도 지쳤다. 하여간 이제는 유의미한 사고 능력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웬만한 음악은 적당히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혼자 있을 땐 굳이 음악을 안 듣긴 한다. 게임을 할 때마저도, 내가 소리를 켜놓고 플레이한 첫 번째 게임이 피크민4다. 불과 며칠 전에 살까 말까 고민하던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즐겨하던 게임들의 배경음악을 전혀 알지 못한다. 연말에는 몇몇 사람들의 영향으로 그들이 틀어놓은 음악 소리를 자주 듣고 지냈는데, 그것으로 인해 무언가가 활성화되어 버린 느낌이다. 정적 속에서 머리에 울려 퍼지는 음악은 썩 유쾌하지 않다. 보컬은 살짝 뭉개진 채 악기 소리 위주로 울려 퍼지는 것 같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재생되며 임의로 중지하지 못한 채 그저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며 사라지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사라질 때까지 나의 사고 능력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친다. 때로는 음악이 실제로 틀어져 있는 것과 비슷한 수준까지 가기도 하고. 보통 사람들의 경우엔 어떤지 궁금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