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26일 수요일 을사년 기묘월 갑오일 음력 2월 27일
현재 내 다이어리의 주요 용도는 기억의 외부 저장소인 듯하다. 일정 관리 하는 데도 쓰이긴 하지만 사전 계획보다는 사후 기록의 역할이 더 크다. 어떤 일이 있었고 무엇을 느꼈는지 작성하는 일기에 비해서 언제 무엇을 했는지가 중점이 되는 기록을 남긴다. 큼직한 사건들 위주로 기록하기도 하고, 기분 내킬 땐 보다 자세한 내용을 적어 놓기도 한다.
그렇게 적어 놓으면 다시 읽어보기는 하냐, 라고 한다면 그렇다. 생각보다 좀 읽어보는 편이다. "이게 언제였더라?" 하고 훑어보는 경우도 있고 "이 날 뭘 했더라?" 하고 훑어보는 일도 있다. 아무래도 그런 걸 잘 기억하지 못하는 녀석이다 보니 그렇게 외부 저장소의 도움을 받는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조차 "기술교육원 다니고 있어요" 이상의 대답을 하려면 외부 저장소의 힘을 빌려야 한다. 최근에는 지정 좌석을 배정받았고, GTQ 1급 기출문제를 풀고 있으며 등등.
적어놓은 내용 그 자체로 정보가 되기도 하지만 그 텍스트가 트리거가 되어 나의 기억을 건드리기도 한다. path 다루는 연습을 했다는 학습 내용을 보며 "아니 근데 내 옆사람이..." 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기억 속 어딘가 무의식의 영역에 존재하기는 하는데 끄집어내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내용이 많다. 파일 시스템의 inode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데, 조금 다르긴 하지만 어떤 맥락에서 스쳐 지나갔는지는 알 것 같다. 임의의 공간에 저장되어 있는 데이터에 인덱스를 통해 접근한다는 관점에서는 비슷할 수 있지. 이렇게 문득 떠오른 내용에서 의식의 흐름을 타고 흘러가다 보면 무의식의 영역에는 생각보다 많은 기억이 내장되어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파일 시스템 하니까 운영체제 수업을 듣던 시절의 새천년관 계단을 올라 수업을 들으러 가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늘 기억의 주소를 찾길 어려워했는데 이렇게 외부 저장소에 주요 키워드를 적으며 기억에 가상의 인덱스를 부여할 수 있다는 걸 최근 몇 개월 사이에 알았다. 작년에는 늘 하루를 마무리할 때쯤, 그러니까 이미 하루 일과가 거의 잊힐 때쯤 기록을 남기곤 했는데, 실시간으로 "이때부터 이때까지는 이런 거 했음" 하는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면서 외부 저장소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거다. 작성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꾸준히 작성하다 보니 이게 꽤나 유용하더라.
가끔 누락된 정보에 대한 기억을 찾을 때 나의 외부 저장소가 얼마나 유용했는지 새삼 느낀다. 아직 온전히 괜찮은 정신으로 살아가지는 못 하다 보니 기록할 여력이 없다면 하루이틀 기록이 누락되는 날들이 있다. 내가 찾고자 하는 정보가 하필 그런 날에 있다면 나에게는 그 어떤 단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날에는 높은 확률로 소셜 미디어 등 다른 매체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테니 원하는 정보를 찾기란 더더욱 어려워진다. 어떤 때 보면 기억 측면에서 다이어리에 너무 의존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