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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망각

2025년 4월 6일 일요일 을사년 경진월 을사일 음력 3월 9일

by 단휘

애초에 사람을 기억하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녀석이지만, 유독 기억하기 어려운 이들이 가끔 있다. 두 번째 만남에 벌써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하고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번을 보고 들어도 매번 새로운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리는 상대도 있어 아무래도 무의식이 상대에 대한 기억을 보유하길 거부하는 것 같다.


상대를 이상하리만치 망각해 버리는 현상을 처음 인지한 건 2023년 하반기의 일이다. 2022년 하반기부터 종종 마주쳤던 분이 있는데, 그분이 인사할 때마다 매번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 사람에게 인사를 할 수 있게 된 건 2024년 중반쯤 되었을 때인데, 그때마저도 그 사람 자체를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기보다는 나와 친분이 있어 보이는데 누구인지 모르겠는 사람을 그 사람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지원사업에서 만난 다른 청년 분들과 함께 만나는 경우에는 그렇게 알아볼 수 있지만, 우연히 어딘가에서 따로 마주치게 될 경우에는 아직도 알아볼 자신이 없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건 방학역 근처에서였을 텐데, 그때도 함께 있던 일행이 그를 부르는 걸 듣고 알았다.


알고 있었는데 잊어버리는 경우에 대해 인지한 건 좀 더 최근 일이다. 작년 상반기에는 청년 모임에 초대받아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가끔 있었는데, 그렇게 초대받아서 가는 게 전부였다 보니 멤버 구성에 선택권이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쾌한 언행으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일행으로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상성이 맞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무조건 배제하기보다는 최소한의 상호작용은 할 수 있고 싶어서 관계를 유지해 봤지만 역시 종종 부정적인 트리거를 작동시키는 바람에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넘어서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으로 이어졌다. 다수의 사람이 모이게 되면 자연스레 하위 집단으로 나뉘어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그런 경우에 그 사람이 없는 쪽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나의 최선이었다. 작년 3월에 크게 기분 상한 이후로는 친한 청년 분들에게는 그 사람 있으면 날 부르지 말라고 했지만 우연한 만남에서 함께 하게 되었을 때에는 적당히 외면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작년 하반기 언젠가부터는 사람들과 다 같이 모이기보다는 좀 더 친한 사람들끼리 따로 모이는 경향성이 커지면서 더 이상 마주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니까 그 사람이 언급되었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안 나더라. 어딘가의 프로그램에서 마주쳐도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걸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이 또한 방어기제의 일부일까. 알고 있던 사람을 잊어버리는 경우에는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에 대한 방어기제일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처음부터 기억하지 못하는 건 뭘까. 강의실에서 늘 옆자리에 앉는 양쪽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통성명을 계속하면서도 저 정도로 기억 못 하는 사람은 그때 그 사람 밖에 없긴 했다. 성향적으로 나랑 잘 맞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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