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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지리

2025년 4월 9일 수요일 을사년 경진월 무신일 음력 3월 12일

by 단휘

충청남도 홍성에서 영유아기를 보내다 올라와 20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서울에 살았지만 거의 서울 토박이나 다름없는 삶 속에서도 서울 지리를 잘 모른다. 고등학생 때 대학 입시를 위해 지하철로 두 개 역만큼 떨어져 있는 대학에 가는 데도 굉장히 낯설었다. 사람들은 "서쪽에 홍대 동쪽에 건대" 하면서 중고생 때에도 종종 놀러 가곤 했던 모양인데, 나는 그런 문화와 거리가 멀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는 곳들은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나오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얼마만큼 가야 나오는지는 모르겠고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학생 때보다는 좀 더 이곳저곳을 다니게 되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까지도 어디가 어디쯤인지 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주요 생활권은 광진구/동대문구/성동구이며 최근에 강동구가 추가되었고 종로구도 살짝 걸쳐 있다. 완전히 서울 동부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동부권 지리조차도 파악하기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주요 생활권은 대학생 때부터 몇 년 동안 전혀 바뀌지 않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법한데도 늘 가던 곳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가는 길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관심 밖이었다. 처음 길을 찾을 땐 지도를 보느라 주변을 살펴보지 않고, 길이 익숙해지면 주위를 둘러보기보다는 익숙한 길을 습관적으로 걸을 뿐이니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누군가 "거기 이러저러한 곳 근처 아니에요?" 하며 말을 걸어도 그 근처에 그런 게 있었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생각해 보면 주요 생활권까지 갈 것도 없이 내가 사는 동네마저도 가로로 나 있는 큰길 하나만 알고, 그곳마저도 뭐가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노래방이 하나 생겼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고 찾아보니 이미 폐업한 지 몇 년이 되었다거나.


대략적인 서울 지리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건 작년 하반기의 일이다. 가을부터 겨울까지 서울둘레길을 돌며 몇 주에 걸쳐 조금씩 알아갔다. 이쪽엔 도봉산이 있고 저쪽으로 좀 더 가면 북한산이 있고 하는 식으로 외곽의 산 위주로 알게 되어 그 동네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말이다. 이 동네가 그 동네구나 하며 조금씩 파악되는 곳들도 있긴 했다. 그렇게 큼직하게 한 바퀴 살펴보고 나니 좀 더 세부적인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2호선 성수 지선을 타고 올라가면 체감상 북쪽으로 가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서쪽으로 휘어었다는 것도 지하철과 지리가 어느 정도 겹쳐 보이면서 인지되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체감상의 지리와 실제 지리 사이의 괴리가 있는 부분은 여럿 있었다.


모든 걸 다 아는 건 무리겠지만 자주 가는 곳, 내 생활권 내의 이곳저곳만이라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싶다. 그리하여 좀 더 현실을 살아가는 티를 내고 싶은 걸까. 가끔은 우리 동네에 대해 나보다도 서울 서부권 사람이 더 잘 아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면 괜히 기분이 미묘하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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