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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행거

2025년 4월 22일 화요일 을사년 경진월 신유일 음력 3월 25일

by 단휘

거의 입지 않지만 공간만 차지하는 옷이 많다. 옷을 많이 사서 그렇다기보다는 잘 안 버려서 그렇다. 옷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버리는 걸 잘 못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옷이 유독 거슬리는 건 행거에 걸려 있는 옷들이 시각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겠지. 서랍 두 칸이 딸린 옷장 하나와 다섯 칸짜리 서랍장, 그리고 행거 두 개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간단히 말해 내 방의 한쪽 면이 전부 옷을 보관하는 데 사용되고 있으며 작은 행거 하나만큼 초과되어 ㄱ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적어도 그 ㄱ자의 삐져나온 작은 행거만큼의 양을 줄이고 싶은데 자꾸 어디서 옷이 생긴다. 내가 사는 것보다도 받은 옷이 많다. 지난번에 사이즈가 안 맞거나 많이 낡은 옷 위주로 과감하게 처분하고 다시 정리해서 넣으면서 느낀 건데, 반팔 상의 중 절반 이상이 내가 산 게 아니더라. 학부생 시절에 다양한 IT 행사에 놀러 다니는 걸 즐겼다 보니 그런 행사 티셔츠도 꽤 많고 말이다. (그런 개발자 티셔츠에 체크 남방 하나 걸치고 나가면 개발자룩 완성이다)


작은 행거는 공간 차지하는 것은 둘째치고 저렴한 제품 적당히 샀던 거라 살짝 불안정한 느낌도 있다. 그런데 방 정리를 한다며 이것저것 갈아엎던 나의 형제와 이야기하다 보니, 작은 책장을 하나 처분하고 행거를 들여올까 하고 있더라. 나는 나의 행거보다는 그 책장이 좀 더 끌려서 서로 교환하기로 했다. 그러는 김에 내 방도 정리를 하고 말이다. 사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녀석이 너무 만하서 정리를 할 때가 되긴 했다. 일단 주말에 행거와 책장만 교환해 놓고 조만간 마저 치워야지, 하고 넘겼다. 지금은 2/3 정도 치운 것 같다.


준비도 없이 행거를 책장으로 바꾸었기에 행거에 있던 옷들이 갈 곳이 없다. 다행히 옷이 많이 걸려 있던 건 아니고, 입었던 옷을 따로 걸어놓았을 뿐이다. 주로 나의 후리스와 후드집업, 야구잠바 같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아직 세탁할 때가 되지 않았지만 안 입었던 옷과 함께 걸어놓고 싶진 않은 외투들의 모임이라고 할까. 나는 이 네 칸짜리 책장을 개조하기로 했다. 원래 h형 책상의 일부로 쓰이던 다섯 칸짜리 책장이었는데, 책상이 부서져서 두 칸이 병합되었다고 하더라. 넓은 칸을 어떻게 쓸까 하다가 드라이버를 집어 들었다. 위쪽 판때기를 더 위로 올려 그 칸을 더욱 확장했다. 이제 그 위칸은 3cm 정도의 공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넓은 칸에 옷걸이를 걸어 버렸다. 즉, 행거를 처분하고 수납공간이 몇 칸 딸린 보다 안정적인 행거를 얻은 것이다.


그리 해놓고 외출하고 돌아오니 가족으로부터 옷걸이가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 도구를 얻을 수 있었다. 듣자 하니 나의 형제가 책장을 보고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책장을 사용한다고 말을 했다고 하더라. "그거 안 떨어지냐?"라는 질문에 "긴 막대기를 껴놓던가 하면 될 것 같긴 한데 찾아봐야지" 하고 대답했던 것까지 얘기한 모양이다. 원래 자전거 짐끈이었으나 이제는 사용되지 않던 녀석이 나의 책장에서 옷걸이가 빠져나오지 않게 하는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3cm짜리 칸의 앞부분은 옷걸이가 걸려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낭비되지 않냐고? 거기에는 판다지아 사전 초청 이벤트 때 받은 푸바오 퍼즐이라거나 어떤 이모가 만들어 준 종이형 굿즈, 그리고 푸바오 1살&2살 배지를 비롯한 금속 배지들이 있다. 바로 위칸에 판다 굿즈들이 이사 오면서 그들의 지하실이 되었다.


다르게 생각하기라고 하던가. 원래의 용도가 무엇이든 간에 내 손에 들어온 순간 내 마음대로 사용해 버리는 경향이 있더라. 특히 나에게 모든 책임과 권한이 있을 때 말이다. 내 방이 아니었다면 책장을 행거로 쓰는 건 생각만 했겠지. 어쩌면 이런 쪽으로의 상상력도 타고난 재능 같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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