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휘 Oct 08. 2024

#36 이해

2024년 10월 8일 화요일 갑진년 갑술월 을사일 음력 9월 6일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그 거부감은 때로는 공포로 표출되고, 때로는 불안으로 표출되며, 때로는 분노로 표출된다. 어떠한 경우라고 해도 썩 좋지 못한 상황이다. 그것들은 내가 잘 통제하지 못하는 감정들이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10여 년 전, 그것들을 통제하려 들다가 다른 감정에 대한 표출도 통제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감정들에 대한 표출도 확연히 줄어들긴 했지만 다른 감정들에 대한 표출이 더 많이 줄어든 것 같다는 건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이겠지. 20대 초반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 감정이 가장 통제되던 시기의 나를 봤을 것이다. 이제는 그래도 좀 더 다양한 감정 표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편이지만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는 나로 하여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 그 어떤 사고도 이어지지 않은 채, 그저 그 무언가에 매몰되어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인식에 휩싸여 다른 그 무엇도 신경 쓸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주변의 모든 게 낯설게 느껴지고 그 무언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만 같다. 어쩌면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실린이 느끼는 공포가 이런 감각일까, 싶기도 하고.


불안이 강하게 느껴질 땐 가만히 있지 못한다. 초조하게 행동하고, 때로는 물리적 자해가 뒤따르기도 한다. 물리적 자해는 나 자신에게 통증을 가함으로써 불편한 정신적 자극이 아닌 이 새로운 물리적 자극에 집중하게 하고, 평범하게 살아 있어 이 통증이 느껴진다는 사실이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이게 심할 땐 목이나 팔에 상처를 남긴 채 살아가기도 하지만, 요즘은 그 정도까지 발현되지는 않는 편이다. 친구랑 있을 때 이런 반응이 오면 내 손을 잡아준다거나 하여 나로 하여금 스스로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기도 하더라.


불안이 물리적 자해를 야기한다면 분노는 정신적 자해를 야기한다고 할 수 있겠다. 주변에 짜증스러운 투로 대하며 공격적으로 대하기도 한다. 결코 싸우고 싶지 않은 녀석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내게 소중한 물건조차 집어던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것이 스스로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 자신의 행복에 반하는 행동을 하곤 한다. 언젠가 후회할 게 뻔한 행동들이 터져 나오며, 감정이 극단적으로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공격이 나를 향하던 불안과는 달리 공격이 외부로 향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억누르면 왠지 눈물이 흐르곤 하더라.


특정 대상에 대한 이해할 수 없음은 점차 커져 결국엔 나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 나의 언행, 그리고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그 혼란 속에서 때로는 그나마 기댈 수 있는 사람에게 집착하려 들기도 하지만, 상대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취급하거나 이런 식으로 매몰되는 건 결국 건강하지 못한 관계라는 걸 알기에 나 자신을 통제하곤 한다. 결국 기댈 곳도 없이 혼자 심리적으로 방황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매거진의 이전글 #35 말높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