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휘 Nov 02. 2024

#59 활동 중단

2024년 11월 2일 토요일 갑진년 갑술월 경오일 음력 10월 2일

생각이 많아졌다. 함께 작업하던 동료의 선택은 커다란 파괴력을 가졌다. 그리고 늘 신중하고 다른 사람을 많이 신경 쓰며 배려해 주던 그가, 신미년생 특인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던 그 특유의 성격 좋음이 무색하게, 집단에 엄청난 타격을 가했다. 무엇이 그를 그 지경까지 내몰리게 만들었을까 싶다가도, 나로 하여금 그곳에 대한 마음을 돌리게 만든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마음이 떠났지만 내가 그곳에 아직 머무르고 있는 건, 오로지 남겨질 이들에 대한 감정 때문이겠지. MBTI를 들먹일 때 '극단적 T 성향' 운운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그렇다는 설정이다. 그렇게 하나라도 명확한 게 있지 않다면 MBTI 추종자들은 받아들여 주지 않거든. 당장 검사해서 현재 값을 알아오라고 하거나 그들이 알고 있는 단편적인 정보로 나에 대한 걸 멋대로 추측하려 든다. 하지만 F/T 값은 I 성향과 마찬가지로 고립감 속에서 T 쪽으로 치우쳐지긴 했지만 본질적인 성향 자체는 이 또한 중간 언저리다.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로봇처럼 감정을 잘 모르는' 게 아니라, 그냥 감정에 대한 인지와 표현이 서툰 녀석일 뿐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뭐라고 정의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여간, 즐거운 자리에서 분위기를 엎으며 작별을 고한 백 군을 기억하고 있는 경 형이 그런 선택을 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역할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하루 전 날 갑작스러운 중단 선언이라.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에는 당일 잠적을 해버린 선 형이 있었지. (백 군과 선 형은 동갑인데 왜 무의식의 영역에서 호칭 차이가 나는 건지 의문이군.) 책임감으로 버티기에는 정신적으로 너무 내몰린 상태였던 모양이다. 어떤 심정일지는 알 것 같다.


"극단 그만둔다는 얘기 했어?" "아니, 아직."


결심을 한 것과 실행을 하는 것 사이에 시간차가 있다. 나의 역할은 끝났어도 극단 내에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니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들의 마음에 싱숭생숭한 감정을 가미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 커다란 파장 없이, 최대한 무해하게, 그렇게 최소한의 영향력으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가 끝나고 다음이 진행되기 전 시점이 적절할 것 같았다. 그 사이에 몇몇 단원들에게는 나의 결심에 대한 단서를 흘려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아직 고민 중이라는 듯이 언급하지만 사실은 결심이 선 상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가끔, 아주 가끔씩, 연출님이 다른 단원에게 내가 하는 것처럼 하면 된다고 하거나, 시범을 보일 것을 요구할 때, 역시 그만두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공연을 앞두고도 부족한 이들에게 지적을 하시다, 때로는 지나치게 연습이 덜 된 이에게 화를 내시기도 하는데, 그 와중에 나에게는 연출적인 디렉팅과 보완을 위한 조언 정도의 느낌으로만 이야기할 때도, 이 정도면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 내가 극단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것을 상기시켜 준다. 누군가의 언행 속에서 나의 결심을 더 확고히 하게 된다.


누군가는 연습은 힘들지만 공연을 올리면 즐겁다고 하는데, 나는 연습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만, 연기 외적인, 부차적인 요소들이 나를 괴롭힌다. 몇 년이고 도저히 인지가 되지 않는 영역에 대한 지적과 내 역량을 넘어선 무언가에 대한 당연시함. 그것들을 버티기 힘든 와중에 극단 활동 때문에 포기했던 몇 가지 기회들을 떠올리면(단기적인 일이라면 잠시 극단에 불참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보다 장기적으로 불참하게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휴면단원 제도가 사라진 지금으로서는 안녕.), 이곳에 남아있는 게 얼마나 정신건강에 안 좋은지 깨닫게 된다.


어찌 되었건 오늘의 공연은 어떻게든 진행되는 모양이다. 채팅방에는 결론만 올라오고 개별적으로 연락이 간 듯하다. 나에겐 어제 15시 30분 무렵에 이어 23시가 넘어서 연락이 왔었는데, 낮 공연에서만 작은 도움을 주기로 했다. 경 형의 경우에는 어떻게 하기로 된 건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역시 난 그런 걸 궁금해하면서도 직접적으로 물어보기를 주저하는 녀석이라. 이따 연습실에서 넌지시 물어보도록 해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