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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휘 Nov 12. 2024

#69 생존

2024년 11월 12일 화요일 갑진년 을해월 경진일 음력 10월 12일

예전의 내 모습이 돌아오는 건 긍정적인 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운 일이다. 내가 외면해 온 현실을 마주하는 것일 수도 있고, 방어기제 속에 숨어 있다가 그 밖으로 한 발 내딛는 것일 수도 있다. 마음 뒤편에 갇혀 지내다 세상을 마주하려는 용기를 낸 자는 자기 자신을 마주할 용기도 필요하다. 하지만 난 후자가 조금 부족했던 모양이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나 자신의 개인적인 두려움이 더 크다.


어쩌면 그건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내가 가진 '강해져야 해' 드라이버는 내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겠지. 타고난 성질로는 세상을 버티기 힘들기에 방어기제적인 인격이 드러나곤 했던 나의 청소년기의 기억은 상대적인 정서적 안정화 속에서 함께 잊혀 버린 모양이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정서적 섬세함이 많이 모자라기에 발생했던 이슈들은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반응을 해야 한다'는 식의 알고리즘적 언행으로 잘 포장해 왔지만 역시 인간관계가 깊어질수록 어려운 문제다.


나는 내게서 떠날 순 있지만 이겨낼 순 없는 걸 난 알아버렸어
― 「슬픈 아픔」, 서태지와 아이들 4집 수록곡


도피는 쉽다. 이겨내는 건 어렵다. 「슬픈 아픔」의 가사를 인용하면서 속으로는「Take Three」를 주장한다. 「ㄱ나니」의 영역은 이미 오래전에 초월했다. (10대 시절의 내가 서태지 노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이 노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죽음과 닿아있는 나의 이면과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제는 일경험 프로그램 업무 시간 도중에도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리곤 하더라.


하지만 알잖아. 마주하지 않는다면 이겨낼 수 없다. 도망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다룬 작품이 〈유진과 유진〉이었지. 언젠가 읽었던, 어렴풋이나마 기억나는 몇 안 되는 소설 중 하나다. 완전히 잊고 지내다가 몇 해 전인가 옆방 사람이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을 언급하면서 떠올랐는데, 내용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더라.


자기파괴적인 도피에 대한 갈망이 끓어 오르곤 한다. 그러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데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면 나를 둘러싼 갈등은 어떻게든 해소되지 않을까. 잊어버려 날 이젠, 하는 노래와 함께 사라져 볼까. 나와 많이 닮아 있는 나의 친구에게서 어떤 답을 갈구하게 되다가도 한편으로는 내가 너에게서 그 어떤 답도 찾을 수 없길 바란다. 어쩌면 정답일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완전히 부정하고 외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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