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6일 토요일 갑진년 을해월 갑신일 음력 10월 16일
이 글은 언젠가 서비스 종료된 플랫폼에 작성했던 글을 현재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기존에 작성된 글은 2022년 4월 23일 토요일에 작성되었다.
살다 보면 어떤 패시브 스킬을 가진 인간들을 만날 수 있다. 그 패시브 스킬이라는 게 왜 존재하며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해한다기보다는 그저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타고난 특성으로 존재하며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패시브 스킬은 삶에 도움이 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해제할 수 없는 디버프처럼 삶을 옥죄어 오기도 한다. 그리고 패시브 스킬의 작동 조건이 겹쳤을 때 무엇이 발현되는지 우선순위가 있는 것 같은데, 스킬 랭크 같은 걸까 싶다.
내가 패시브 스킬에 대해 처음 느낀 건 대학생 때였다. 당시 주변인들의 사례 몇 가지를 적어놓은 게 있는데, 그때의 기록에 따라 별칭을 사용하지 않고 알파벳 한 글자의 이니셜로 그들을 언급하도록 하겠다. 패시브 스킬의 이름은 당시에 내가 스킬의 특성에 대해 임의로 붙인 것이다.
V는 「최악 내성」 패시브를 가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최악을 면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그럭저럭 괜찮은 상황으로 흘러간다. 일이 아주 잘 풀리지는 않지만 늘 최악은 면한다는 점에서 생존에 유리한 특성이다. 다만, 일이 아주 잘 풀리지는 않는다는 게 가장 큰 흠이다. 아주 밑바닥으로 내려가지도 않지만 아주 위로 올라가지도 못한다. 막말로 "좆되지도 잘되지도 않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J는 「과적합의 늪」 패시브를 가지고 있다. 지나치게 계획적인 성향으로 인생의 모든 것을 계획하여 살아가는 녀석이었는데, 그의 삶의 모든 게 그 계획에 과적합되어 있고, 사고방식마저 그 어떤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예외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 삶이란 늘 예상치 못한 변수가 튀어나오는 것이기에 과적합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자주 목격되곤 했다. 수강신청 한 번만 잘못해도 인생이 나락 갈 것처럼 반응하던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으려나.
D는 「진짜 신포도」 패시브를 가지고 있다. 무언가를 달성하지 못했거나 어딘가에 합격하지 못했을 때, "저건 신포도일 거야"라는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실제로 미달/탈락하는 편이 더 이득이었던 것이다. 탈락 후 그것에 합격했으면 잡지 못했을 더 좋은 기회를 만난다거나, 때로는 탈락 후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이 신포도 같은 것이었음을 전해 듣는다거나.
흥미로운 건, 내가 J를 알고 지내면서 그의 삶이 무난하게 흘러가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으며 항상 과적합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는데, 그가 그럭저럭 무난하게 흘러가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목격된 단 하나의 시기가 D와의 협업이었다는 점이다. J의 패시브 특성상 여러 가지 변수로 일이 잘 안 풀리는 일이 많은데, 그들의 협업이 D의 입장에서 부정적으로 다가왔다면 D의「진짜 신포도」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협업이 성사되면서 그것은 "신포도"가 아닌 게 되었고, 그 패시브 효과가 J의 「과적합의 늪」 보다 상위 랭크의 스킬이라 J에게 있어서 흔치 않은 괜찮게 흘러가는 시기였지 않았나 싶다. 상위 랭크 스킬에 의해 미발현으로 넘어갈 수도 있으니 패시브 스킬이란 절대적인 무언가라기보다는 그런 경향성이 높아진다,라고 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게임이나 캐릭터 설정집처럼 이런 스킬들을 명시적으로 볼 수 있으면 어떨까 싶다가도, 정말 이 스킬들의 정체를 모르겠다. 우연이라고 치고 넘어가기엔 타고난 특성으로 너무 명확하게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언젠가 누군가와 이런 패시브 스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상대가 자신도 패시브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어쩌면 일부 인간들이 패시브 스킬을 가진 게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패시브 스킬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 일부만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