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여행은 파인애플 통조림으로부터 시작됐다.
홍콩 영화 <중경삼림>에서 금성무는 만우절인 4월 1일,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받는다. 그는 연인의 헤어지자는 말을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그녀가 다시 돌아올 거라 믿고 매일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산다. 그리고 참 엉뚱한 결심을 한다. 통조림을 30개 살 때까지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마음의 유통기한도 그대로 끝나버린 것이라 인정하겠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말한다. "기억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 촉촉한 눈으로 그가 그리 말했을 때 나야말로 결심했다. 홍콩 여행을 가야겠다고.
처음엔 혼자였다. 그러다 친구 ‘은’이 동행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은이는 어디든 떠나고 싶어 했고 그곳이 어디든 나와 함께면 좋을 거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가는 4시간 내내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중경삼림>을 봤다. 그 옆에서 나는 입 벌리고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았다. 한참 헤드뱅잉을 하다 일어났을 때도 은이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통조림 동지가 생겨 흐뭇한 얼굴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분명 웃으며 시작했는데 공항버스를 타러 가는 길엔 어느새 웃음기가 싹 가셨다. 블로그에서 찾아본 버스는 노선이 바뀐 건지 우리가 가려는 숙소에 가지 않는다는 거였다. 무거운 캐리어를 버스에 실었다가 다시 내렸다. 겨우 제대로 된 버스를 찾아 다시 짐을 싣고 2층 명당에 앉아서 갔다. 비교적 짧은 비행에도 눈이 꾸벅 감기는 체력이 원망스러웠다. ‘아, 오늘 뭐 할지 계획이라도 짜야 하는데···.’ 속으로 웅얼거리며 창문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그래도 큰 범위의 계획은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영화 <중경삼림> 속 다양한 촬영지를 찾아 나서는 것. 홍콩 영화의 LP를 구입하는 것. 그리고 주윤발이 자주 간다는 차찬텡 식당에 가고 맛있는 열대과일을 맘껏 사 먹는 것이었다.
숙소에 짐을 놓고 나오자마자 그중 하나를 실행했다. 1평도 되지 않는 작은 상점에서 컵에 조각난 채 담겨있는 과일을 사 먹었다. ‘흠. 생각보다 밍밍하군.’ 한 조각 베어 무는 은이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가장 사 먹고 싶었던 건 금성무가 떠난 연인을 기다리며 샀던 파인애플 통조림인데 결국 찾진 못했다. 대신 조각난 파인애플과 친구가 잠든 사이, 배고픔을 참지 못해 마트에 뛰어가 사 왔던 사과 두 알. 그리고 대체로는 믹서기에 갈린 생과일주스가 다였다.
그렇게 덥고 습한 홍콩에서의 하루하루를 시원한 열대 과일로 달랬다. 특히 여행 마지막 날, 밤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엔 ‘Yau ma tei’ 역 근처를 돌아다니며 빈티지 마켓을 구경했었다. 그곳엔 큰 로컬 과일 마켓도 있었는데 관광객과 현지인이 뒤섞인 공간을 가르고 은이가 흥정에 나섰다. 사과 두 알을 싼 가격에 구입해서 한 알씩 먹어 치웠다. 달디단 과즙이 입가를 적셨지만 닦을 새 없이 행복이 차올랐다.
3일을 꼬박 채운 홍콩 여행이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물론 우리가 먹은 열대 과일들처럼 달디단 순간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진땀 빼던 기억도 많다. 줄 서서 쿠키를 구입해야 하는 ‘제니 베이커리’에서, 현금만 받는다는 걸 몰라 서둘러 돈을 뽑으러 나섰던 때엔 고장 난 ATM기 다섯 대를 거치고서야 겨우 돈을 뽑을 수 있었으니, 안 그래도 더위에 축축하던 이마가 땀으로 흥건해졌더랬다.
그리고 대망의 홍콩 트래블 라스트 씬은 공항을 가기 위해 대기하던 버스 정류장에서 이뤄졌다. 졸다가 캐리어를 손에서 놓치고야 만 것이다. 버스가 내달리는 도로까지 캐리어가 굴러갔다. 떨어진 체력에 판단력이 흐려져 나도 모르게 주우러 도로로 뛰쳐나갈 뻔한 아찔한 순간이 이어졌다. 사람들의 놀란 숨소리와 은이의 말리는 손짓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홍콩 여행의 기억은 거기까지다. 공항 가는 내내 졸고, 가서도 공항 의자에 몸을 말고는 선잠을 잤다. 비행기에서의 4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되었든 무사히 다녀왔음 된 거지. 홍콩의 추억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은 게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아침부터 전화가 왔다. 거 참 중요한 순간인데, 끙. 거절을 누르려 했지만 힘을 주고 있던 탓인지 손가락이 엇나가 전화가 받아졌다.
“네에.. 끙.. 누구세요..?”
상대는 자동 응답기를 장착한 듯 반듯한 말투의 고객센터 직원이었다. 아, 광고 전화 같은데 거절하고 끊어야겠다. 그런 결심을 하고 입을 떼는 순간 직원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다다 고객님 되시죠. 혹시 어제 트래블 ㅇㅇ 카드 쓰셨나요~?”
뭐지, 예상과 다른 스크립트다. 불안한 목소리로 서둘러 답했다. 아뇨, 그런 적 없는데요…
“아, 미국에서 결제 시도가 확인이돼서요.”
“네????”
순간 힘이 탁 불리면서 온 신경이 전화로 쏟아졌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안심하세요. 결제는 안 되었구요. 저희가 카드는 임의로 정지시켰습니다. 오늘 중으로 카드 해지하고 다시 신청하세요.”
“허어억. 저 바보같이 카드 잃어버린 줄도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흑흑.”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잃어버린 게 아니에요. 복제 당하신 겁니다~”
친절한 직원은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나를 달래며 전화를 끊었다. 그 유명한 카드 복제 사례가 나에게도 일어난 것이었다니. 너무 놀란 나는 화장실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홍콩 여행 때 썼던 여행 지갑을 찾아 열었다. 정말 카드는 분실되지 않았고 지갑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다. 어느새 흘러내린 식은땀을 쓰윽 닦으며 생각했다. 참, 무서운 세상이야. 오들오들 떨며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해지된 카드는 다시 쓸 수 없었고 끊긴 신호 또한 다시 이어지지 않았다.
⊙ 글 : 다다 (인스타그램 @ddidawn)
⊙ 그림 : 서콩 (인스타그램 @se0c0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