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렁이의 하루 Ep.24 <라디오 키드는 자라서>
어릴 때 집에 CD와 카세트 플레이어의 기능까지 갖춘 크고 투박한 라디오가 하나 있었다. 작은 방이 유독 허전하게 느껴지는 날엔 CD와 테이프를 넣고 노래를 듣기도 했지만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라디오를 듣는 건 매일의 일과였다. 고 작은 물건에서 흘러나오는 대화 소리가 때론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가상의 친구가 됐다. 가득 찬 고요를 뚫고 들어오는 소란이 어린 맘에 쏙 들었다.
초등학교 때 즐겨 들었던 라디오는 <박남매의 FM 인기가요>였다. 박경림을 너무 좋아해 <네모의 꿈>이라는 책과 <뉴 논스톱>을 즐겨보던 나에게, 경림 언니는 첫 덕질 대상이기도 하다. 박수홍과 박경림이 더블DJ인 라디오 방송을 늦은 밤 드라마 대신 틀었다. 그리곤 그 앞에 엎드려서는 괜히 공책에 이것저것 끄적거렸지만 대게는 어깨를 들썩이며 숨죽여 웃는 밤이 많았다. 두 사람의 만담이 세상 그 어떤 유머 책보다 재밌어서다.
하루치 웃음을 몰아 웃고 나면 들뜬 맘에 잠도 잘 안 왔다. 모든 게 어렵고 어리숙한 어린 세계 너머에 있을 어른들의 유머 공간을 상상하느라, 밤은 짧고도 무진장 길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누구도 모르게 라디오 키드로 자라고 있었다.
그 후로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박스>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 <타블로와 꿈꾸는 라디오> <슈퍼주니어의 키스 더 라디오> <이주연의 영화 음악>까지. 밤이 되면 안테나를 쭉 뽑아 들고 이리저리 헤맸다. 어쩜 그리 웃음도 감동도 만발한 지 나약한 마음을 의지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라디오로 허기짐을 달래면서도 한 번도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단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2014년 근사한 라디오 프로그램 하나를 만나 처음으로 라디오 작가를 꿈꾸게 된다.
나와 동갑인 DJ는 내가 참 좋아하는 연예인이기도 했다. 자정이 되면 침대에 누워서 그의 목소리로 가득 찬 라디오를 들었다. 첫 방송 날 긴장과 떨림이 묻어나던 순간부터 담담한 척 애쓰다 물기 어린 목소리를 비추던 마지막 방송까지 3년이란 시간 동안, 91.9MHz에 내 일상을 끼워 넣었다. 그는 빈 말로 위로하는 법이 없었다. 아무도 하지 않지만 해야 할 말을 했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만든 노래들을 묶어 소품집을 내기도 했다. 애정 없이는 하지 못할 일이었다.
라디오를 사랑하는 DJ가 있는 프로그램을 들으며 덩달아 라디오에 대한 애정을 키웠다. 일기를 쓰듯 자주 사연을 썼고 사연이 소개된 날엔 상기된 얼굴로 밤을 지새웠다. 다시 듣기가 뜰 다음 날이 기대돼서다. 업데이트되자마자 녹음부터 해야겠단 다짐과 벅참, 자랑스러움이 평온했던 마음을 부풀렸다. 어쩜 선곡표는 내 플레이리스트를 꼭 빼닮은 건지 가끔은 누구도 시키지 않은 큐시트를 만들기도 했던 밤이 3년 사이에 있었다.
하지만 큐시트는 작가의 영역이 아니라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라디오 작가가 되기 위해 방송 작가 아카데미를 다니고서부터다. 라디오 수업이 있는 날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 학원에 갔고 맨 앞자리를 차지해 앉곤 했다. 처음 쓰던 오프닝 원고의 짜릿함과 가상으로 코너를 짜던 그 궁리의 시간들이 그 시절 나의 유일한 재밋거리였다. 작은 방 너머를 상상만 하던 다다는 어느새 그 너머의 세계로 넘어갈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라디오 작가가 됐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였는데, 그와 함께 라디오 부스에서 일할 그날을 꿈꾸는 게 당첨된 복권으로 하고 싶은 일을 상상하는 것보다 더 기쁘고 어여쁜 일이었다는 걸 꼭 말해주고 싶었는데,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됐다. 라디오 작가를 꿈꾸게 한 그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면 당시 그의 목소리로 소개된 내 사연을 다시 찾아 듣곤 한다. 그럼 지도에도 없는 어떤 곳에, 아주 푸른 들판에 앉아 사연을 읽고 노래를 부르고 있을 그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마치 내가 라디오를 꺼도 라디오는 멈추지 않는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 실마리 하나가 생을 다독이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한때는 나의 방 한쪽에 붙박이처럼 붙어있던 크고 투박한 라디오는 어느새 없어졌는지도 모르게 사라졌다. 라디오 작가가 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라디오 키드도 그에 따라 조금은 불성실하고 불량해지고 만다. 라디오 대신 다운 받았던 각 방송사의 라디오 애플리케이션은 업뎃하지 않은 지 오래고 어쩌다 듣게 되더라도 오프닝 멘트를 듣고 필러를 좀 듣다 보면 스르륵 잠에 빠지는 밤도 많다. 그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라디오 부스 속 내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은 지 오래다. 그 긴 시간 동안 깨달은 건 라디오에는 웃음과 감동만이 만발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새삼스런 진실을 알아버린 라디오 키드일지라도 여전히 라디오가 좋은 건 어쩔 수 없나보다. 24시간 어디서든 라디오를 켜면 노랫소리와 말소리가 흘러나온다는 사실이 아직 나를 벅차고 기쁘게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게 라디오 키드는 자라서 라디오 작가가 됐고 라디오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덜렁이의 하루 (인스타그램 @dadashour)
글 : 다다 (인스타그램 @ddidawn)
그림 : 서콩 (인스타그램 @se0c0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