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동안 라디오 작가로 일하면서 가장 공을 들여 썼던 건 ‘역시나’ 오프닝 원고였다. 세어보니 1,028개의 오프닝 멘트를 썼다. 어떤 날엔 단 10분 만에 쓸 말이 떠올라 나를 기쁘게 하기도 했고, 또 다른 날엔 3시간을 모니터 앞에 앉아 있어도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고작 한 페이지짜리 원고가, 나를 들었다 놨다 했다. 라디오에 송출되는 시간으로 계산한다면, 약 1분 남짓의 시간일 뿐인데도.
도저히 애써도 원고가 풀리지 않을 땐 다른 라디오 오프닝을 찾아들었다. 듣자마자 감탄이 나오던 수많은 오프닝 멘트들. 그 멘트들이 꽉 막혔던 내 원고의 길을 시원하게 뚫어주기도 했지만 때론 그 훌륭하고 유려한 문장들에 자괴감 섞인 사자후를 내지르기도 했다.
어쩜 이리 멋진 글을 쓸 수 있을까. 우리 DJ도 이런 좋은 작가를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훌쩍.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단순히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글을 ‘말글’로 바꾸는 능력, DJ의 말투와 딱 어울리게 맞춰 쓰는 능력이 라디오 작가에게 필요로하는 능력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첫 오프닝 원고를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와는 20년이 넘게 나이 차이 나는 DJ가 조심스레 말했다. “다다씨, 오늘 원고는 제 식대로 좀 고쳤어요. 미안해요.” 그러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DJ 표정을 보는데, 꽉 닫힌 부스 문을 열고 어찌나 도망치고 싶던지.
때때로 조사를 잘못 쓰거나, 문장을 길게 늘어뜨려 쓴 날엔 DJ는 언제나 말을 버벅거리곤 했다. 그럴 때면 DJ가 아니라 나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DJ에게 원고란, 믿고 나아갈 나침반과 다름없으니까. 나침반을 보며 사뿐 걸어갈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며 걸어갈지는 DJ의 역량이지만 “이 방향으로 가시면 됩니다~”하고 방향을 잡아주는 건, 언제나 작가의 몫이다.
제 몫을 해내지 못한 날은 집에 가는 발걸음이 갈지(之)자가 된다. 휘청휘청, 비틀비틀, 덜컹덜컹, 어기적어기적. 그리하여 끝내 침대에 철퍼덕 누워 이불을 걷어차게 만들던 절망과 기쁨의 다른 이름, 지난한 오프닝의 세계.
새해가 되니 그 무수하고 어려웠던 오프닝 원고 중 1월의 오프닝엔 어떤 이야기를 썼는지 궁금해졌다. ‘220108’이 붙은 파일명을 클릭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그때의 오프닝은 제주도에 있는 ‘용눈이 오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2022년 1월 당시 ‘용눈이 오름’은 2021년부터 약 2년간 ‘자연휴식년제’에 들어간 참이었다. 수시로 오가는 사람으로 인해 훼손되었던 오름은 문을 꼭 닫고 기나긴 쉼에 이르렀다. 일주일을 마무리하는 오늘. 우리도 자연휴식년제에 들어간 듯이 복잡한 생각, 쓸데없는 참견은 끼워주지 말고 그저 쉬자는 말이 DJ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건 사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오프닝 멘트를 빙자해서 하고 싶고, 듣고 싶은 이야기를 끄적여댔다. 목소리 좋은 아나운서 DJ도 있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이야기를 적절한 방법으로 전달하기 위해, 부끄럽지 않은 오프닝을 쓰기 위해 매일 뉴스를 들여다보고 가끔은 지역 신문을 뒤적거리기도 했다. 그곳에서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하지만 그럼에도 닮아 있는 타인의 기쁨과 슬픔, 고단함, 환희를 봤다. 다른 형태의 삶과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누는 공감의 힘을, 라디오를 찾아 듣는 사람이라면 잘 알 거라 그리 믿으며 힘을 줘 타자를 쳤다.
때문에, 내가 쓰고 DJ가 읽고 청취자가 마음 기울여 듣던 ‘우리들의 오프닝’엔 명랑한 이야기만 있진 않았다. 아픈 순간의 이야기도 가득하다. 그렇게라도 서로 위로를 주고받으면,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받을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문득 2022년 11월 4일이 적힌 원고 파일을 열었다. 그날의 오프닝은 한 청취자의 문자로 시작한다. “아픈 마음, 우리 같이 덜어내요. 2022년 11월은 치유의 달로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나눌수록 덜어지는 슬픔이 있다는 걸 청취자도, 그리고 나도 믿었던 것 같다.
해를 건너도 아직 치유되지 않은 이야기를 품고 2025년에 도착한 지금. 그 마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작은 말 하나 얹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새해라는 오프닝을 쓴다. 겪었던 수많은 지난 새해와는 달리, 들뜬 마음보단 차분한 마음이 된다. 그런 고요 속에 깃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는 한 해가 되면 좋겠다는 소망 하나가, 깜빡이는 커서 위에 진한 글씨로 새겨진다.
⊙ 글 : 다다 (인스타그램 @ddidawn)
⊙ 그림 : 서콩 (인스타그램 @se0c0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