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는 ‘모모’였다. 트와이스 모모가 아니다. 미하엘 엔데의 소설 속 주인공 ‘모모’다. 모모는 슬퍼하는 법이 없다. 주변 친구들을 헤아리고 누구의 말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 한 점에도 쉽게 휘청이던 성정은 ‘모모’의 단단함이 닮고 싶었다.
2017년 라디오 프로그램 막내 작가로 일하면서 홈페이지 올릴 제작진 명단에 진짜 내 이름 대신 ‘모모’를 올렸다. 나의 직속 선배이자, 내가 사랑하는 ‘정’ 언니도 이름 대신 ‘엠마’라는 닉네임을 올렸다. 뜻을 묻는 나에게 언닌 웃으며 ‘애 엄마’의 축약형이라고 했다. 엠마 언니에게는 이제 막 세 살이 된 딸 지우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델마와 루이스, 아니 엠마와 모모가 되어 1년 10개월을 함께 했다. 어떤 일이든 척척 해내는 멋진 엠마 언니와 허둥거리느라 바쁜 모모였다.
그 시간 동안 난 이름 석 자 대신 ‘모모’라고 불렸다.
“모모야, 이거 봤어?”
“모모 어딨니?”
“모모, 왜 저런다니?”
엠마 언니와 함께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없어지기 전, 마지막까지 함께한 G 피디님은 은퇴를 얼마 앞두지 않은 베테랑 PD였다. 40년의 시간 동안 한 획을 그은 대중가요는 모두 그의 귀를 스쳐 지났을 터였다. 유행하는 아이돌 노래는 몰라도, 80, 90년대 가요엔 전문가와 다름없었다. 그런 그는 사람들이 나를 ‘모모’라고 부르는 걸 보고 놀리듯 노래를 불렀다. “모모는 철부지~모모는 무지개~”
처음 그 노래를 들었을 땐 얼굴에 물음표만 띄웠다. 마주 물음표를 띄우던 PD가 곧 김만준의 노래 <모모>를 모르냐며 되물었다. “그게 뭐예요?” 여전히 어리둥절한 나를 보며, 곧 30년 넘게 나는 나와의 나이 차를 떠올렸나 보다. “그래, 니는 어려서 모르겠다~” 하고는 휑 자리를 떴다. 그럼 난 덩그러니 남아 혼잣말만 하는 거다. 그런 노래가 있었구나, 가사 참 재밌네.
프로그램은 없어지고, 회사에서 나를 모모라 부르는 사람도 점점 적어졌다. 남은 사람은 내 친구들과 내가 ‘모모’이던 시절 프로그램을 함께했던 피디님들, 엠마 작가님까지. 다른 말로 나의 막내 시절을 함께 겪던 분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그들 앞에서 철이 좀 없는 편이다. 내가 이상해 보일까 고민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마구 내뱉는다. 그럼 “씁... 모모 네가 지금 몇 살이지?”하고 묻는데, 그 놀림 섞인 물음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미하엘 엔데의 소설 속 단단한 ‘모모’의 성정을 닮고 싶었는데 아마 난, 김만준의 <모모>를 닮은 게 분명하다.
‘모모는 철부지’라 부르던 G 피디님은 잘 지내실까. 그런 생각을 하다 궁금해졌다. 너는 어떤 모모이길래, 나를 철부지로 만드니. 전곡을 들어본 적 없는 <모모>란 노래를 찾아 들었다. 그러던 중 이 곡이 <자기 앞의 생>이라는 책에서 영감을 받아 우리나라 작곡가 박홍철 씨가 만들었다는 글을 발견했다.
<자기 앞의 생> 속 주인공 모모는 미하엘 엔데 <모모> 속 주인공 모모와는 다르다. 그는 들이닥친 무수한 시련 앞에 서 있다. 주변을 돌아볼 만큼의 빈방이 그에겐 없다. 자기를 부모처럼 보살펴준 ‘로자’ 아주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묻는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하지만 그는 이미 답을 아는 듯하다. 여전히 어렵고 다채로운 세계 속에서도 또 사랑을 찾아 삶을 살아간다.
모모는 철부지/모모는 무지개/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 바늘이다/모모는 방랑자/모모는 외로운 그림자/너무 기뻐서 박수를 치듯이 날갯짓하며/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을 꿈꾸는/모모는 환상가/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인간은 사랑 없인 살 수 없단 것을/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래 <모모>의 가사를 새로이 본다. 철부지이자, 니스의 새를 꿈꾸던 아이. 방랑자이자, 기쁨의 박수를 칠 줄 알았던 아이. 생의 행복을 외면하지 않고 기어코 찾아내고자 애쓴 아이. 그랬기 때문에, 울면서도 달리던 아이. 사랑이 있는 세상을 꿈꾸던 그 아이를 그려본다. 아마 나는 그런 모모를 닮았나 보다.
⊙ 글 : 다다 (인스타그램 @ddidawn)
⊙ 그림 : 서콩 (인스타그램 @se0c0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