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렁이의 하루 Ep. 3 <난 우울할 때 대장금을 봐>
서울에서 자취하던 시절엔 5평 크기의 원룸 하나가 세상 전부인 거 같아 울적해지곤 했다. 그래서 단숨에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콘텐츠를 찾아 헤맸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무한도전>, <1박 2일> 모음집,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질투의 화신>, <뉴 논스톱> 걱정 없이 행복하던 시절에 봤던 TV 프로그램들이다. 그중 54부작에 이르는 대하드라마 <대장금>은 가장 많이 정주행한 콘텐츠였다.
2003년 <대장금>이 방영될 시기,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다음 날 일찍 등교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밤 10시가 되면 뒤가 뚱뚱한 브라운관 TV 앞에 자리 잡고 앉아 11번을 틀었다. <대장금>을 보기 위해서였다. 엄마랑 소파에 등을 붙이고 때론 간식을 먹기도 하며 매주 월요일 화요일을 보냈다.
"고기를 씹을 때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대,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대···." 작디작은 아기 장금이는 우물쭈물하면서도 소신있게 제 생각을 말했다. 그런 장금이가 수라간 궁녀가 됐다가 모함으로 궁을 떠나고 나중엔 의녀가 돼서 다시 궁으로 돌아오는 걸 보며, 나의 롤모델을 정한다면 그건 장금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웅의 서사에 환장하던 중학교 1학년이었으니까.
궁에서 펼쳐지는 음식 경합과 적절한 때에 흐르던 BGM “오나라 오나라 아주 오나~”는 한창 재미난 이야깃거리를 찾아 헤매던 어린 소녀의 눈을 반짝거리게 하기 충분했다. 다음 날 등교하면 친구들과 대장금 얘길 하느라 바빴다. 그 시절, ‘오나라’ 송은 교가보다 많이 불린 우리들의 떼창 곡이었다.
그 이후로 긴 기간에 걸쳐 때마다 힘이 들거나, 도피하고 싶어지는 순간에는 <대장금>을 찾았다. 퇴사하고 쉬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또 일을 구해야 하는 게 벌써부터 아득해져서 도피할 콘텐츠를 찾던 중, <대장금>을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잊고 있던 명대사가 만 나이 서른넷의 마음을 콕콕 찔러오기 시작했다.
또 한 번 위기를 맞게 된 장금이에게, 절친 연생이는 어떡하냐고 호들갑을 떤다. 묵묵히 듣던 장금이는 딱 한 마디로 대꾸한다. “연생아. 그냥 가야 할 때가 있어. 주어진 상황에 어찌할 도리 없이 그냥 가야 할 때. 지금이 그런 때야. 그냥 가야 해 지금은. 두려움도 버리고, 생각도 버리고.” 중학교 1학년에게는 와닿지 않았을 그 대사가 서른 넷에게는 어찌나 와닿던지 고일뻔한 눈물의 눈가를 스윽 닦아냈다.
그렇게 장금이가 궁녀를 거쳐 의녀가 되려는 그 사이를 정주행하고 있을 무렵, 언니와 조카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됐다. 늘 톡으로 <대장금> 강제 시청을 권했었는데, 조카를 재우고 난 저녁 시간, 드디어 언니와 함께 앉아 장금이를 보게 됐다. 언니는 대략적인 줄거리만 알고 있어서 궁금한 게 많았는지,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헐. 어떡해? 장금이 의금부로 끌려가는 거야?" "한상궁 마마님은 어떻게 되는데?" "금영이는 나쁜 애야?" 대장금 오타쿠인 나는 평소라면 귀찮았을 질문에도 신나서는 조잘조잘 다 대답해 줬다. 그리고 이번 회차의 클라이맥스, 한 상궁 마마님의 죽음에 엉엉 울다가 여운에 잠겨 눈물을 톡톡 닦아내는데, MBTI T인 언니가 산통을 깨는 거였다. "근데 저, 머리에 뭐 두른 아저씨는 의사야? 장금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인데?"
나는 분위기를 와장창 깨는 언니를 째려보며 최 상궁 마마님처럼 표독스럽게 외쳤다. "아 의사 맞다고!! 장금이가 ‘별주부 나으리’라잖아! 것도 몰라?!" 그리고 딱 그 타이밍에 들려오던 장금이의 대사. "정주부 나으리,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타이밍도 참 무심하지. 언니는 ‘풉-’ 하고 웃었고 나는 창피함에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별주부 할 때 별은 ‘자라 별’인데···. 별주부는 거북인데···. 거북이가 의관 옷을 입고 근엄한 표정으로 진맥하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나도 별안간 웃음이 터졌다. 대장금에 울고 웃던 그 밤, 자그마한 걱정거리도 제주도 밤바람을 타고 저 멀리 실려 갔다.
⊙ 글 : 다다 (인스타그램 @ddidawn)
⊙ 그림 : 서콩 (인스타그램 @se0c0ng)
⊙ 덜렁이의 하루 (인스타그램 @dadasho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