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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실수 일지

by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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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음생음사이지만 나에게 R&B 음악은 낯선 축에 속한다. 아이돌 음악, 밴드 음악만 찾아 들어도 하루 종일 바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귀는 활짝 열고 사니 제목과 가수는 몰라도 유행하는 알앤비를 들으면 ‘아, 이거!’하고 아는 체를 하곤 했다.


6년 전, 오랜만에 만난 지인 K와의 대화 화두는 ‘요즘 무슨 음악 들어?’였다. 잘 듣지 않던 알앤비 음악치고는 꽤 자주 듣게 되는 노래가 있어서 말을 꺼냈다.


"아, 나도 요즘 자주 듣는 알앤비 음악 있는데. 그... 누구더라.. 그 사람 노래 좋던데...그으…...." 한참 머리를 굴리는데도 가수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 거였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그의 이름. "브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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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듯한 얼굴로 활짝 웃으며 K를 보는데 오묘한 표정이 아닌가. 응? 뭐지. 브러쉬가 아닌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갸웃거리는 나를 보고 K는 빵 터졌고, 그제야 이례적으로 자주 듣던 알앤비 가수의 이름이 브러쉬(Brush)가 아닌 크러쉬(Crush)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웃음을 머금고 이름을 정정해 주던 K를 보며 나의 얼굴은 블러셔를 한 것처럼 새빨개졌더랬다. 그 후로 K와는 연락이 끊겼는데 TV에서 크러쉬를 볼 때마다 K 생각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K는 잘 살고 있을까? 크러쉬를 보며 가끔 나를 떠올리기도 할까. 어찌 됐든, 그 후로 난 크러쉬의 이름을 틀리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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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브러쉬 사건’이 아니더라도 말실수는 언제나 졸졸 나를 쫓아다녔다. 예컨대, 속으로 ‘재밌게 놀다 갑니다’라고 말해야지 생각해도 입으로 툭 튀어나오는 건 ‘재밌게 먹다 갑니다’인 것이다. 타자를 칠 때도 마찬가지다. 손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건지, ‘푸른 하늘에는 경계선이 없었다’를 ‘푸른늘하에는 경계선이 없다’라고 잘못 적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럴 땐 “으아아 또!!”라고 울부짖으며 완성되지 못한 문장을 backspace로 지우는 손길이 퍽퍽, 거침없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모로 어리숙한 라디오 막내 작가 시절은 말실수로 점철된 나날이었다. 당시 프로그램에서는 DJ와 게스트가 대결을 벌인 뒤 진 사람이 벌칙을 해야 하는 코너가 있었다. 그리고 방송에서 결과를 읽어주는 중요한 역할이 나에게 주어졌다. 하. 순간 대처 능력이 뛰어나지 못한 나에겐 정말이지, 매주 코너가 있던 화요일이 미션의 나날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름 순조롭게 미션 수행을 해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어김없이 코너가 마무리될 때 쯤, 마이크에 대고 결과를 발표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내가 해야할 대사는 이러했다. ”이번 벌칙은요. 아기공룡 둘리가 되어서 노래를 불러주세요.“ 침을 꼴깍 삼키고는 타이밍에 맞춰 멘트를 시작했다.


“이번 벌칙은요. 아기공룡 둘기가 되어…”


비둘기도 아니고 무슨 둘기야. 당황한 난 더듬 거리며 외쳤다. ”아..아니 둘리···!“ 수습하는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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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입과 생각은 친해지질 못해서 따로 노는 것일까. 하지만 그래서 마냥 창피하기만 하냐고 묻는다면 아뇨. 말실수 후 잠깐의 정적 뒤에 이어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사뭇 가벼워진 공기의 흐름이 때론 나를 웃음 짓게 만드니, 꼭 이불킥을 불사할 만큼의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아주 진지한 회의 시간에 “이 코너 진행하면 디제이랑 게스트가 티키타카 하는 모습이 재밌을 거 같은데요?”라고 해야 하는걸, '티카티카'라고, 잘못 발음해 모두의 얼굴에 물음표를 띄게 했던 건 좀 창피한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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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나의 입과 생각에게 이 자리를 빌려 부탁합니다. 진지할 땐 분위기 파악 좀 하길 바라며 웬만하면 원만한 합의를 바라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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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다다 (인스타그램 @ddidawn)

⊙ 그림 : 서콩 (인스타그램 @se0c0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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