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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먼 기억의 로드 무비

by 다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방학을 맞이한 열네 살 청소년은 엄마 몰래 집을 나선다. 일산에서 수원으로 가려면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가수가 수원에서 팬 사인회를 연다길래 응모했더니 덜컥 당첨됐다. TV와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만 보던 나의 little star는 정말 살아 숨 쉬는 존재일까, 오늘 난 이것을 반드시 확인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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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도 너무 춥다. 몰래 나왔으니, 다시 겉옷을 가지러 들어갈 수도 없다. 영등포까지 가는 버스를 타러 얼른 정류장으로 향했다. 영등포역에 도착해서는 1호선으로 갈아타 수원역으로 향했다. 그래도 팬 사인회까지는 다섯 시간이나 넘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청소년은 춥고, 쉽게 출출해져 버린다.


잠시 상가에 몸을 피해 추위를 녹이는데, 건물 1층에 있는 가게 사장님이 나를 보며 묻는다.


“이 이른 시간에, 여기서 뭐 해요?”

“....아....저, 여기 팬 사인회 한다구 그래서 왔어요.”

“어디서 왔는데?”

“....일산.....”

“어휴, 먼 곳에서도 왔네.”


단순한 호기심은 금방 측은지심이 된다. 들어와서 몸을 녹이라는 다정이 건네진다. 곧 간식까지 꺼내 내어준다. 이제 청소년은 춥지 않다. 배도 든든해졌다. 금방 히죽 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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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렬로 쭉 서서 얼른 다섯 시가 되길 기다렸다. 시린 손을 비벼가며 서 있는데, 5시 5분이 되어도, 10분이 되어도 그는 오질 않는다. 그렇게 30분이 지났다. 드디어 그가 도착했다. 심장이 벌렁 뜀박질을 시작한다. 회피형인 청소년은 그만 집에 가고 싶어진다.


‘꼭 실물을 봐야 하는 걸까? 이러다 심장 터지면 어쩌지?’

‘무슨 말을 하지? 굳어버릴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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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그동안 꿈꿔온 최고의 순간을 앞두고 깊은 한숨이 나온다. 어서 이 시간이 지났으면 좋겠다. 아아아. 그렇게 차례의 차례를 지나, 드디어 내 차례다. 유리문 사이로 그가 보인다. 심장이 이번엔 높이 뛰기를 시도한다. 이러다 고꾸라질지도 몰라. 한 명, 두 명, 점점 내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사라지고 마침내.


그가 코앞에 있다.


“안녕하세요.”

“(개미 목소리) 네..네...아..안녕하세여...”

“이름이?”

“다다요...”


쓱삭쓱삭, 10초도 되지 않아 사인을 완성한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그리고 손을 내민다. 악수하자는 신호다. 벌벌 떨리는 손을 쭈욱 내밀었다. 마주 손을 잡은 그가 한마디 한다.


“아이구. 손이 왜 이렇게 차요?”


님이 늦게 왔잖아요..........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냅다 저었다. 그가 웃었다. 현장 스태프가 나를 톡톡 치며, 내 시간이 끝났음을 알려왔다. 오는 데 2시간 20분, 다시 집 가는 데 2시간 20분. 고작 2분도 안 되는 이 만남을 위해 나는 왕복 5시간을 달려온 건가. 청소년은 머리가 아찔해진다. 집에 가는 길이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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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몇 년 지나지 않아 탈덕을 했다. 그러고도 나의 새로운 최애들은 몇 차례 생겨났다 사라졌다. 콘서트를 가고 가끔 굿즈도 사지만 다시는 팬 사인회를 꿈꾸지 않게 됐다. 가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아이돌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나이지만, 정말이지.....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을 나보다도, 아니 나의 반만큼도 사랑하진 않는 것 같다.


그래도 기억을 흑역사로만 남길 순 없으니, 그때로부터 20년이 흐른 오늘의 난 일산에서 수원으로 향하는 그 길에 필터 하나를 씌운다. 그러므로 기억은 시네마가 된다. 감독도, 시나리오 작가도, 주연도 온통 나. 영화 <본즈 앤 올> 속 섬뜩한 길 위의 사랑이 나에게 닮고 싶은 사랑의 형태로 남은 것처럼. <윤희에게> 속 윤희가 현실과는 상관없이 용기 내 떨리는 마음으로 첫사랑을 만나러 오타루에 가는 길처럼. 그렇게 기억은 근사한 로드무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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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다다 (인스타그램 @ddidawn)

⊙ 그림 : 서콩 (인스타그램 @se0c0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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