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11시가 되면, 필리핀에서 전화가 걸려 온다. 내내 잠잠하던 스마트폰 스피커를 뚫고 이질적인 언어가 툭 튀어나온다. “Good morning! How are you today?” 이제 막 잠에서 깨 갈라진 목소리의 내가 짧게 준비해 둔 대본을 커닝해 가며 대답을 이어간다. “Today’s a.....um.... funny day. I went to.......yoga class... and I ate fruit!!!”
상대가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게, 작게 고르는 숨소리로 느껴진다. 나의 대답이 끝나면 그는 더 발랄한 목소리로 답장을 해온다. “Really? It’s good!” 해맑은 그 목소리에 조금은 뜨끔해지는 거다. 아니요, 사실 저 과일 안 먹었어요. 공복이에요. 이제 막 잠에서 깼는걸요....
하지만 그런 말도 못 하고 ‘아하하’ 웃으며 넘긴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나의 일상에 대꾸할 말을 잃어가던 그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Did you oversleep again?”라는 질문에 “헛, yes...!”하고 머쓱해하며 웃던 게 어제와 그제의 이야기였으니 이건 하얀 거짓말이야. 그렇고말고.
아침 전화 메이트이자, 전화 영어 선생님인 그의 이름은 Rina이다. 매일 꼬박꼬박 나의 영어 스피킹 수준에 맞게 숙제를 내주고, 내가 뱉는 말을 하나하나 체크해 가며 맞게 고쳐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의 성실함에 비해 나는 좀 불량한 축에 속한다. 숙제는 늘 벼락치기고, 복습엔 게으르다. 매번 틀리는 걸 또 틀릴 땐, 상냥히 지적하던 Rina의 입에서도 한숨이 튀어나온다. 그럴 땐 달리 방법이 없다. 전화기를 바짝 붙잡고 눈치를 살살 보며 바짝 엎드리는 거다. 쏘리, 아돈폴겟ㅜㅜ 아윌 리멤버! 휴, 다음엔 절대 틀리지 말아야지. 그리고 또 실수를 반복한다. 티쳐의 한숨이 깊어진다.
우리의 전화 목적은 나의 영어 실력 향상이지만, 가끔은 Rina도 나와 함께 땡땡이를 칠 때가 있다. 무심코 건넨 서로의 일상이 너무나 재밌을 때 그렇다. 특히 Rina와 내가 과거 연인과 있었던 Bad story를 이야기할 땐 서로의 X 보이쁘렌드를 더 욕하지 못 해 안달이다.
하지만 짧은 언어 능력은 늘 말을 순화시키는 법이니 ‘뭐 그런 미친놈이 다 있어?’라고 말하고 싶은 걸 “Oh my god. He’s a bad boy”하며 숨소리로 내가 격분했음을 티 낸다. 그러다 우린 서로가 너무 오버해서 흥분했음을 깨닫고 깔깔거리며 웃는다. 그럴 때면 마치 우리에겐 시차도, 나이 차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새 수업 진도도 잊고, 마칠 시간도 지난 채 서로의 이야기에 몰두다.
그와 함께 사는 3마리의 개도 우리의 대화 주제가 된다. 가끔 그는 자신의 발치에 와 어리광을 피우는 반려견에, 웃음을 터뜨리며 잠시 수업을 중단해도 되냐고 묻는다. 그럼 나도 따라 웃으며 흔쾌히 그러라고 답한다. 길어지는 대화에 잠깐의 쉼을 거는 순간이다.
다시 돌아온 Rina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대화를 이어간다. 우리의 수다는 간단한 아침 일과에서 그의 반려견으로 확장된다. 영어 활자만 빼곡하던 채팅창은 즉석에서 찍은 Rina의 반려견 사진으로 가득해진다. 그가 사진 밑에 ‘Cotton ball’이라는 단어를 덧붙인다.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번역을 누른다. 번역된 한글은 ‘솜뭉치’. 너무 귀여운 단어에 깔깔 웃어버린다. 우린 또 해야 하는 진도를 마저 채우지 못하고 수다만 떨다 전화를 끊는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목소리와 사는 나라가 아는 것의 대부분인 우리는 서로의 일상에 쉽게 침투한다.
비교적 가벼웠던 대화 분위기가 깊이를 달리한 건, 전 애인에 관한 얘기를 할 때도 아니고 좋아하는 음식을 얘기할 때도 아니었다. 우리 스스로의 생각과 가치관, 삶에 관해 이야기할 때였다. 지금 퇴사를 하고 지내는 나의 심정을 토로하면,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Rina도 자신의 얘기를 하기 시작한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삶에 관해 털어놓는다. 또 어릴 때부터 어린 동생을 보느라 분주하게 보낸 일상에 관해 이야기한다. 필리핀에선 여자는 어릴 때부터 요리하는 법을 배우고 아이를 돌보는 것을 배운다고 했다. 그게 그곳에선 당연한 일상이라는 말에 시차보다도 다른 우리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게 어느새 Rina와 매일 가지는 30분간의 수다 시간은 아침의 활력이자 워밍업이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수인 나에겐 영어 실력 향상보다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돈을 아껴야 한다는 것. 전화 영어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나에게, Rina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든 궁금한 게 있으면 우리가 대화하는 이 대화창에 말을 걸어도 된다고. 비행기로 5시간 넘게 떨어진 곳에 사는 나의 영어 선생님이 그리 말했다.
그러고도 8개월이 흘렀다. 얼마 전 홍대에 갔다가, 누군가가 영어로 길을 물어보길래 길을 알려주고 돌아섰다. 목적을 잃고 수다의 장이 되곤 했던 수업이, 어느 정도의 목표를 달성했음을 느꼈다. 이제 난 외국인이 길을 물어도 입을 꾹 다문 채 손짓발짓만을 내세우지 않는다. 틀린 문장이어도 뱉고 본다. 그들을 보며 Rina를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매일 똑같이 이어지던 겨울의 어느 날, 잠이 덜 깬 나에게 Rina는 또 물어왔다. “How are you today?” 구체적인 대답 대신, 내가 건넨 건 온통 하얗던 창문 밖 풍경 사진이었다. 이례적으로 폭설이 내린 2월이었다. 눈이 쌓인 거리의 나무와 초등학교 풍경에 Rina는 감탄을 연발했다. 그날 나의 목적은 그것뿐이었다. 나의 여름 나라 선생님에게, 겨울을 선물해 주는 것. 해맑게 좋아하던 Rina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포근했다.
또다시 겨울이다. 자고 일어났더니, 창밖은 온통 White Cotton ball. 여름 나라에 앉아 실시간으로 전송된 눈 선물에 기뻐하던 한 여성을 떠올린다. 쉬운 영어 한마디를 내뱉어도 “Great!”, “Good!” 응원을 아끼지 않던, 얼굴도 모르는 나의 아침 전화 메이트를 떠올린다. 추위에 웅크렸던 마음에, 불쑥 용기가 차오른다.
⊙ 글 : 다다 (인스타그램 @ddidawn)
⊙ 그림 : 서콩 (인스타그램 @se0c0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