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

by 무연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저는 이 대사를 참 좋아해서, 항상 차고 다니는 목걸이에 새기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처음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저는 이제까지 꾸역꾸역 살아왔던 제 삶을 무엇보다 잘 설명해주는 대사라고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지 못한 주인공들, 해방을 찾아 방황하는 주인공들. 저는 그들에게 짙은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제 삶이 겨우 버텨야 살아갈 수 있어서 그랬을까요. 한 발을 어렵게, 그렇게 해방을 찾아 떠나겠다는 주인공들의 결심이 저에겐 작은 숨통과 같았습니다.


저는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야 비로소 머물 곳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으며, 오로지 나만의 공간이자 나를 지킬 수 있는 곳. 그저 감정을 차단한 무의 세계가 아니라, 아주 조금이라도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뭐라도 좋은 감각들이 살아 깃든 곳. 때문에 그것은 하얀 공간일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것이 필요해진 저는 제 안에 조용히 공간을 하나 짓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하얀 공간과 다르게 제 의지로 만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곳을 ‘한 발’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무너진 한 걸음이라도, 어렵게라도, 가야 했으니까요.


‘한 발’은 8평 남짓의 방이 하나 있습니다. 방은 벚꽃색의 벽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바닥에는 부드러운 회색 러그가, 햇빛이 드는 창가 아래엔 혼자서 쓰기 널찍한 소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이트 톤의 침대는 방 한쪽에 조용히 눕혀져 있고, 마찬가지로 새하얀 책상이 그 옆에, 그리고 그 안에 투명한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다른 쪽 모서리에는 철제 책장이 있는데 그곳엔 좋아하는 책과 제가 전공한 서적들이 가지런히 꽂혀있습니다.


벽으로 가볼까요. 책상 한 면이 붙어 있는 한쪽 벽에는 그간 여행하면서 모아둔 엽서와 소중한 사람들과 찍은 사진들, 제가 좋아하는 배우의 포스터, 그리고 나를 나락에서 지탱해주는 몇몇 문장들이 스티커처럼 붙어 있습니다.


그런 방을 중심으로 ‘한 발’에는 널찍한 주방도 달려있습니다. 밝은 나무결과 짙은 녹색이 조화를 이루는 주방은 요리와 친숙한 저에게 나다움을 되찾기 위한 중요한 공간 중 하나입니다. 마음에 허기가 지고, 아무도 곁에 없고, 외로움이 밀물처럼 쓸려올 때면 저는 이 주방을 찾았습니다. 혼자 먹을 작은 식사라도, 저는 정성껏 차려 저 스스로를 대접하려 애를 썼습니다. 신기하게도 그저 상상에 불과할 뿐인 이 모든 과정의 식사는 제 마음을 풍족하게 채워주었습니다.


주방 반대편에는 욕실이 있는데 거의 ‘한 발’의 방만큼 큰 욕실입니다. 욕실은 하얀 대리석과 회색빛의 마블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으며, 조그만 원형 욕조와 주황빛 LED가 비추는 거울이 저를 반깁니다. 제가 욕실을 찾을 때는 주로 현실을 살며 “더럽혀졌다.”, “씻고 싶다.”는 강박에 시달릴 때입니다. 제 자신을 소독하기 위해 술을 숱하게 찾았던 날 대신 선택한 ‘한 발’의 욕실 속에서 저는 안전하게,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며 몸을 씻었고, 가스비와 물값 걱정 없이 마음껏 욕조에 몸을 담그며 몸도 마음도 차가운 저를 데웠습니다.


‘한 발’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다락방입니다. 8평짜리 방 어디에 계단이 있으며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는 별로 따지고들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내 상상 속 그 다락이 선명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다락방은 주로 어린 날 내가 해보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담은 공간으로 꾸몄습니다. 내 몸 하나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텐트의 천장을 별 모양으로 오렸고, 그 틈으로 작은 조명들이 은하수처럼 반짝거리게 했습니다. 텐트 안에는 애착을 담은 인형과 수건이 놓여 있었는데, 저는 그 틈 사이에 끼어 그것이 주는 안정감과 함께 아무 생각 없이 숨을 쉬었습니다. 그 누구도 저를 방해하거나 그 공간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오직, 나만이 조용하게 내려앉은 공간입니다. 그러고 저는 그것이 현실 속에서 선택할 수 없던 외로움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구조라고 여겼습니다.


저는 이 ‘한 발’에서 울었고, 말없이 노트에 글을 적었고, 고양이와 함께 잠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언젠가 내가 ‘회복’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주 조금, 조심스레 믿기 시작한 것도 이 ‘한 발’이라는 공간을 만든 이후였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이런다고 현실이 달라져?”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게 ‘한 발’은 그저 하루를 버티기 위해 만들어낸 ‘하얀 공간’과 달리 내 의지로 만든 첫 세계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자주 무너지고, 여전히 하얀 공간에 살고 있지만, 언제든 내 의지대로 갈 수 있는 이 방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버텨볼 만합니다.






“나는 오늘도 꾸역꾸역 살아간다.

어제의 나를 데리고,

내일의 나에게 닿기 위해,

무너진 채로도

한 발씩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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