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통만 가득할 것 같은 나에게도 짧게, 짧게 행복이라는 순간이 다녀가곤 했다. 그럼에도 반짝였던 순간들이다. 궂은날로 가득했던 삶 속에서 나를 살 수 있게 버티게 만든 하루였다.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나에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존재는 없었다. 적어도 음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남들보다 2년 일찍, 대학이라는 환경을 접해야 했던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나는 또, 혼자여야 하는 걸까? 온갖 불안이 합격 통지서를 받은 이후부터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까지 나를 괴롭혔다.
나는 소심하게 굴지 않기도 했다. 쭈구리였던 과거를 떨쳐버리기 위해선 없는 용기를 쥐어짜야 했다. 입학식 당일, 짙게 화장을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수수한 옷차림에 평범해 보이는 두 사람이 서로 어색하게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좋지 않은 과거가 나의 발목을 잡으려는 것을 겨우 떨쳐내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바이올린으로 입학한 나와 달리 피아노를 전공한 그들이었다.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공기는 그들 역시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몇 마디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나보다 더 긴장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 역시 일면식 하나 없는 이 공간에서 누가 먼저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진정으로 기뻤다. 이렇게 간단하고 쉽게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와 그들은 빠르게 친해졌다. 우리는 곧 수강 신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가능하면 수업이 겹치게끔 짜보자고 굳은 다짐을 했다.
우리는 자주, 많이 붙어 다녔다. 세 명이었던 우리는 다른 수업에서 혹은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을 붙이고 붙여 7명이 되었다. 무지개. 우리의 별명이었다. 모든 수업을 다 맞출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가능하면 공강이나 짧은 쉬는 시간을 이용해 최대한 수다를 떨었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연습실을 빌려주거나 대신 맡아주는 일도 허다했으며, 실기 시험이 다가올 때면 떨리는 것을 방지해 한 사람씩 번갈아 가며 나머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곡을 연주하는 일도 있었다.
7명이 함께 있으면 우리는 막강했다. 누구 하나 힘든 일이 있거나, 다른 사람과 불화가 있거나, 속상한 일이 생기면 마치 내 일 같이 벌 때처럼 달려들었다. 아무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었다. 나는 내 곁에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것이, 이제야 진정한 친구를 사귄 것 같은 마음에 하루하루 생기 어린 눈으로 학교생활을 즐겼다.
무엇보다 견고할 것 같던 우리도, 고난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우리의 결속은 생각보다 쉽게 깨졌다. 한 명, 한 명, 7명에서 6명으로 다시 6명에서 5명으로, 우리는 줄어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떠나는 나를 배웅하는 친구는 이제 4명뿐이었다. 유학에서 돌아왔을 땐 3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족했다. 나는 여전히 우리가, 든든했으니까. 언제고 그때의 무모했던 패기 어린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나는 소중했으니까.
10여 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나는 그 세 명의 친구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예전만큼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마치 오래된 앨범처럼 그리우면 다시 또 다시 꺼내 볼 수 있는 친구들로. 짙은 먹구름으로 가득했던 바이올린이라는 세상에 빛을 선사해준 친구들로.
나를 무던히 괴롭혔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나면, 적어도 마음에 평화가 내려앉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운 동화 속 결말과 달리 누구보다 나를 이해해 주던 목소리를 강제로 빼앗겼다는 생각 속에 갇힌 나는 한참의 시간을 자책하고 괴로워하며 몸부림쳤다. 이제 더는 나를 알아주는 친구가 사라졌고, 허허벌판 가진 것 없는 나에게 남은 건 현실에서의 되도 않는 관계뿐이었다.
그런 나를 안쓰럽게 본 건, 독립하여 나와 가깝게 살고 있지 않았던 엄마보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제2의 아빠처럼 따르던 외삼촌이었다. 외삼촌은 바쁜 사람이었다. 목회를 하며 이곳저곳에서 강의도 하고,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고, 수많은 책을 읽는 것처럼 자신이 필요한 지식을 쌓는데 한치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목사가 되기 전의 삼촌은 나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주는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잠깐 얼굴을 보는 것도 어려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 삼촌이 목소리를 잃고 풀이 죽어 동네를 기어 다니다시피 전전하는 나에게, 여행을 청했다. 내가 좋아하고, 자신 있는 일본으로의 여행이었다.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 집안 분위기 탓에 우리 가족, 외삼촌 가족, 그리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까지 대가족이 여행을 가는 건 자주는 아니었지만 불편한 일도 아니었다. 꼭 1년에 한 번, 할머니, 할아버지의 기념일에 맞춰 잠깐이라도 콧바람을 쐬고 오던 우리 가족이었다. 그런데 삼촌과 나, 단둘의 조합? 이건 낯설었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신선하고도 엉뚱한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원체 삼촌을 좋아했고, 바쁜 시간을 일부러 내어준다는 것이 온전히 나를 향한 위로라는 느낌에 나는 이 조합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일본이라면 어디든 상관 없다는 삼촌의 말에 당장 계획 짜기에 돌입했다. 경제적 지원은 엄마가 맡았으니 걸림돌은 없었다.
나는 오사카를 거쳐 돗토리현을 찍고 다시 오사카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계획을 작성했다. 일본 오사카에서 공부한 탓에 나에게 오사카는 너무도 친숙했다. 그런데 나에게 주어진 3박 4일이라는 시간동안 오사카에만 머무르기는 아쉬웠다. 그러다 문득, 여행 프로그램에서 본 돗토리현의 드넓은 사막언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서 밟고, 만지고, 가능하면 눕고 싶었다. 사막을 가본 적이 없는 나에게 그 경험은 새로운 자극이 될 것 같았다. 좋았어! 절로 나오는 감탄이었다.
삼촌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오랜만에 타보는 비행기는 나에게 설렘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제까지의 아팠던 마음이 이 순간 비행기와 함께 하늘에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오사카 공항에 도착해서 우리는 바로 자동차를 렌탈했다. 돗토리현까지 차로 가는 일정이었다. 운전은 당연히 할 줄 몰랐던 나 대신 베스트 드라이버로 소문난 삼촌의 몫이었다. 나는 삼촌의 입이 심심할 것을 대비해 여러 과자를 차려놓고, 삼촌이 잠이 오거나 배가 잠시 꺼지거나 하는 상황에 하나둘 그의 입에 쏙, 과자를 넣었다. 정말 별거 아니었지만, 그런 몫을 내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숨통 트이는 날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오사카에서 돗토리현으로 다시 돗토리현에서 오사카로 내려오는 코스. 그 코스 안에서 삼촌과 즐겼던 일본의 시간은, 단조로웠다. 워낙 말수가 없는 삼촌이라 주로 조잘거리는 건 내 쪽이었고, 삼촌은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누가 나를 판단하지 않은 채, 그저 나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 나는 어쩌면 그런 사람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지났어도 삼촌은 여전히 말수가 없다. 내가 나를 자랑하거나 힘든 일을 말하면 묵묵하게 듣고 만다. 어쩌다 만나면 나는 삼촌의 크고 넓은 품에 폭, 안긴다. 엄청난 위로가 몰려온다.
일본 유학을 하면서 그 사이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많이 지쳤고, 심리학을 하면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기 위해 나를 불태우며 경쟁했다면, 유일하게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으며 불편하게 만들어주는 관계없이 나의 존재 가치를 최우선으로 알아주는 곳에서 일하던 시기가 있었다. 바로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었을 때였다.
일본에 워홀을 가기 전까지 나는 요리에 대해 아는 거라곤 프랑스 유학 때 먹어본 요리가 전부였다. 칼질은 기본적으로 할 수 있었지만, 정체되어있던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한층 변화시키기 위해선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자유로운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직 그때 만해도 제과제빵, 요리에 대한 열정이 있었던 나는 당장 일본으로의 워홀을 알아보았고, 다년간의 유학 덕에 언어가 전혀 문제 되지 않은 영향이 컸는지 한 번에 통과가 되었다.
워홀을 무작정 가자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 프랑스 유학 시절 알고 지내던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도쿄 긴자에서 3성급 레스토랑에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데, 일손이 부족하다는 연락을 주고 받은 적이 있었다. 네가 와준다면 우리는 1년이라도 너무 기쁠 것 같다는 것이 친구의 말이었다.
친구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곳의 최고 경영자와 주방 총괄 쉐프까지 일개 알바생의 신분일 수밖에 없던 나를 환호하며 맞이했고,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은 알고 보니 대다수, 일본에서 내가 나온 학교 출신 요리사들이 많았다. 다들 선후배인 셈이었다.
아직 우리나라의 시급이 만원이 되지 않았을 시절, 나는 일본에서 1,300엔. 대충 계산해봤을 때 13,000원을 살짝 웃도는 돈을 시급으로 받으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돈도 돈이었지만 일하는 분위기가 한국과 프랑스에서 겪었던 것하고 천지 차이었다. 가면, 쌓여 있는 설거지만 시킬 줄 알았고, 늘어가는 쓰레기만 버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충 그렇게 뽑는 것이 알바생 아닌가. 그런데 정작 설거지와 청소는 자신들이 틈이 날 때마다 하고, 나에겐 칼질이나 밑 준비를 시켰다. 무엇보다 감동이었던 것은, 알바 시간이 다 되어 정직원보다 먼저 집에 가게 되었을 땐, “오늘 하루도 도와줘서 고마워!” 라는 말을 으레 한다는 것이었다. 알바가 이런 취급이라니. 최고다. 알바 만세였다.
그곳에서 일을 하는 동안, 기존의 나를 이곳으로 부른 친구 말고도 새롭게 사귄 친구 역시 또 혼자서 겪어야 했던 일본 생활을 견디게 해준 베스트 프랜드로 나에게 남았다. 쉬는 날이 내가 훨씬 더 많았던 나는 그 친구의 쉬는 날에 맞춰 함께 놀이동산에 놀러 가거나, 여행을 가거나, 별것 없이도 찻집에 가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우리는 일터에서도 단짝이었다. 작업 장소가 붙어 있던 나와 친구는 '척'하면, ‘척’ 능숙하게 일을 해내곤 했다. 내가 일하는 날, 그 친구가 쉬는 날일 때면 나는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할 기분이 나지 않는 나를 보며 선배들은 나를 놀리기 일쑤였다. 그 친구는 심지어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일부러 쉬는 날을 맞춰 나를 배웅했다. 나의 짐을 들어주었고, 장난감 뽑기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뽑아 나에게 마지막으로 선물해준 친구였다.
현재는 연락이 잘되지 않지만, 그녀가 주었던 따스한 느낌은 영원히 내 안에서 가시질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