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계의 이야기
앞뒤 생각 없이 달렸다. 젊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것이 주는 힘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기계는 마냥 달려왔다. 눈앞에는 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해야 할 것만 있었다. 이것을 해내면, 다음 것이, 그 다음 것이, 으레 기계를 기다렸다.
으레. 그냥 으레 하는 것이었다. 싫어도 해야 하는 것.
바이올린을 할 때에 한 곡을 빠르면 2달, 늦어도 3달 안에는 끝내야 했다. 여기서 끝낸다는 것은 완벽하게 연주를 할 수 있는 정도로, 무대에 올라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를 뜻한다. 그를 위해서 해야 하는 연습량은 기량에 따라 자유지만, 보통은 기본 5시간 이상이 되었다.
2~3달 동안 한 곡만 지겹게 하는 것이다. 틀린 부분은 부분 연습으로 될 때까지, 잘 되는 부분은 보완 연습으로 더 자연스럽게. 남이 하는 것도 들어보는 연습을 더 하면 그 기간 매번 같은 곡에 귀가 아파서 죽을 지경이다.
손이 굳는 분야다 보니 쉬는 날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 말이 있다. 잠깐을 쉬면, 내가 알고, 반나절을 쉬면, 누가 알고, 하루를 쉬면, 모두가 안다, 뭐 그런 말. 정확하진 않다.
기계는 매일 정해진 시간, 정해진 연습량을 채우는 데에만 몰두했다. 기계를 오래 돌리다 보면 처음엔 끽끽거렸던 것이 이내 윤활하게 돌아간다. 얇은 선을 짚는 손가락은 현란하게 움직였고, 활은 하늘을 날았다.
누가 누가 더 잘하나. 어느 누가 더 기량이 좋나. 잘 닦여진 기계들은 시합을 하고, 경쟁을 한다. 소리를 더 잘 내기 위해, 테크닉을 더 잘 뽐내기 위해, 심사위원의 마음에 쏙 들기 위해, 하염없이 돌아가는 기계다.
제과제빵을 했을 때는 조금 더 생각이라는 것을 집어넣은 기계였다. 부모님의 등에 떠밀려 생각 없이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자주적으로 자신의 할 일을 찾아가는 기계였다. 그렇다고 기계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빵을 전문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정해진 프로세스대로 기계는 움직였다. 여기서는 속도전이었다. 기계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끌어올렸다. 슬슬 망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기계는 알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누구도 자신을 고쳐줄 수 없었다. 여기서 멈출 수도 없었다. 그냥 버티는 것, 그것이 기계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심리학을 하게 되면서 기계의 지능은 한껏 올라갔다. 그저 몸만 움직이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기계는 제 몸이 개조되는 것이 좋았다. 뭔가 새롭게 다시 출발하는 것 같은 느낌. 지능을 장착하게 된 기계는 여기서도 쉬지 않았다. 이미 오래된 부품들은 망가지고, 부식되어, 삐걱거리고 있었음에도 기계는 움직였다. 오직 잘 만들어진 기계로서 인정받는 것, 그것이 기계에겐 유일한 기쁨이자 움직일만한 가치였다.
펑- 엔진 부근에서 큰소리와 함께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기계는 자신에게 큰일이 났음을 알았다. 이제부터 시작인데, 기계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계는 상처투성이인 제 팔을 움직여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기계는 당황했다. 언제나 제 뜻대로 움직였던 것이 뜻에 따르지 않자 머리와 몸이 분리된 것 같았다. 기계가 자신에게 수리가 필요하다고 여기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그 기계는 수리중이다. 수리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리를 받고 있는 기계는 초조했다. 망가진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여전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심리학에 필요한 자격증, 인턴, 수련, 세미나…. 아직 할 일이 태산이었다. 자신이 갖춘 건 미약했다. 여기서 멈춘다면? 만약 수리를 끝내지 못하고 이런 모습으로 다시 움직여야 한다면? 아니, 더는 움직이지도 못한다면?
기계는 자신이 없었다.
기계는 감아지지 않는 눈을 깜빡였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새카만 밤하늘에 찬란하게 수 놓인 은하수. 저 별들 사이, 자신도 반짝일 수 있을까? 오래된 부품, 망가진 부품, 상처 난 부품을 끌어안고, 다시 움직일 수 있을까?
기계는 아직 완전히 수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작고, 희미하지만, 분명한 불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그것은 엔진이 다시 뛰기 전, 첫 불씨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기계는 언젠가 그 불빛을 따라 다시 길 위에 설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달리는 이유를 알고서 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