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생리를 시작으로 마지막 생리를 할 때까지, 나는 한 달의 4분의 1. 한 주를 꼬박 고통에 겨워 지냈다. 그 어떠한 약이나 행위로도 나의 고통은 감해지지 않았다. 어떤 날은 기절 직전까지 밀어붙이는 고통에 땅바닥을 손톱으로 긁으며 끙끙 앓은 적도 있었다. 자궁에 혹이 있거나,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보다 두터운 내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고통을 좀 더 느끼기 쉬울 수 있다는 것이 의사의 의견이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생리로 수업을 봐주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그날이 오면 양호실에서 약을 받아먹는 것으로 그쳤고, 양호실의 침대를 누리는 호사 같은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생리는 일을 할 때에도 방해가 됐다. 더욱이 비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생리에 맞춰 쉬는 날을 잡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운이 좋게 날을 맞춰 쉬면 나는 꼼짝없이 방에서 앓았고, 운이 나쁘게 생리를 하는 날과 일하는 날이 겹치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가며 흐릿한 눈으로 불 앞에 서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양은 또 어떻고. 아직 기저귀형 생리대가 나오지 않았을 시절, 일반 생리대로는 감당이 되지 않아 나는 언제나 성인용 기저귀를 가지고 다녔다. 한창 미모에 관심이 많았던 사춘기 소녀는, 그날이 될 때마다 엉덩이를 한껏 부풀려주는 두터운 생리대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그를 신경 쓸 겨를이나 있었을까. 막대한 양을 쏟아내는 탓에 빈혈로 골골대기 일쑤였던 내가.
안타깝게도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생리가 주는 진짜 고통은 바로 기분의 변화였다. 안 그래도 하루에도 수십 번 기분의 상태가 변화하는 경계선 성격장애인데 거기에 생리가 곁들여지면 나는 히스테리에 절여진 여인이 따로 없었다. 정신과 약을 먹어도 기분 조절은 쉽지 않았다. 생리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반짝이는 날 며칠을 맞이하는 나였다.
이런 불편함을 나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일 년에 한 번도 아니고, 매달 찾아오는 불청객을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었다. 참다못해 산부인과로 달려간 나는 대책을 간구했다. 이렇게 질 떨어지는 삶을 살 수는 없었다. 내 사정을 들은 산부인과에서는 나에게 피임약을 권했다. 당시 피임약이 주는 부작용에 대한 지식이 전무 했던 나는 당장 생리를 멈춰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의사의 권유를 덥썩 받았다. 그로 인해 나의 인생이 어떻게 변하게 되리라는 것은 알지도 못한 채.
폐색전증. 심장에서 폐로 가는 혈관이 90%가 막혔다. 모든 것을 마법처럼 해결해줬던 피임약이 가진, 만 명 중 네 명 꼴로 걸린다는 그 부작용에 내가 걸리고 만 것이다. 나는 죽다 살아났고, 더는 어떠한 종류의 피임약도 복용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망가진 혈관을 어느 정도 고치고 나니,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여전히 생리를 했다. 그것도 이제는 평생 먹어야 하는 항응고제로 인해 더 많은 양의 피를 쏟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무지 생리가 주는 고통에 무뎌지지 않는 나를 지켜보는 엄마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나에게 여성으로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아이, 가지고 싶어?”
그 질문 앞에 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아이를 싫어했고, 원하지 않았고, 키울 자신이 없었다. 엄마와 거의 평생을 애증의 관계로 지냈다. 경계선 성격장애가 언제 나아질지 모른다. 나는 아이라면 겁부터 덜컥 났다. 내가 그 듣기만 하던 아동학대의 주범이 되는 것 아닌가? 아이가 떼를 쓰고, 내 경계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나는 사랑으로 용납할 수 있을까? 손이 먼저 가지 않을까? 나 같은 사람은 아이를 키워선 안 돼. 아이도, 나도 불행해질 거야. 나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엄마는 내 손을 붙잡고, 대학병원으로 갔다. 나를 괴롭히며 놓지 않는 근본적 원인, 자궁을 도려내기 위함이었다.
“절대 안 됩니다.”
의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거의 의사와 싸우다시피 의견을 피력했다. 생리로 인해 받는 고통을 알고 있냐고.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괴로워 차라리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겠다고. 피임약도, 피임기구로도 해결되지 않으니 그냥 수술해 달라고.
엄마의 고집이 센 만큼 의사의 고집도 완강했다. 의사는 자궁이 아이를 가지는 기능만으로 우리의 신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며 자궁을 도려내면 어린 나이에 너무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거의 호소를 했다.
한 치도 양보하지 않던 둘의 침묵이 흐르던 때, 의사가 한숨을 쉬며 나에게 물었다.
“정말 아이를 가지지 않을 의사가 확실하신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해보는 건 어때요?”
의사는 말했다. 두터운 자궁 내벽을 아주 얇은 수준까지 지지고, 그 안에 피임기구를 넣어보자고.
“그럼 뭐가 달라지나요?”
내 말에 의사는 잠시 텀을 두더니 대답했다.
“시술과 함께 피임기구를 끼면 확실히 생리는 더 이상 안 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자궁의 내벽에 수정란이 착상하기 어려워 아이를 가지긴 어려울 겁니다. 그럴 각오가 있다면, 저는 이 방법 말고는 추천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엄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미간을 움찔거리다 이내 하겠다고 했다. 어려운 각오는 아니었다.
시술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호르몬의 변화를 겪어야 했고, 그로 인해 빠른 갱년기와 중성지방 수치가 월등하게 올라갔지만, 생리가 주는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제까지 사놓은 저 기저귀들이 쓸데없는 소모품으로 전락해버렸다. 완벽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꿈에 작은 아이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는 나를 향해 엄마라고 부르며 작은 손으로 나의 손을 꼬옥 잡고 웃었다.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던 아이가 나를 향해 달려오더니 와락, 안겼다. 아이는 사고뭉치에 말괄량이였지만, 나의 사랑을 바라는, 내가 사랑하는 아이였다. 꿈이었는데도 말이다.
묘했다. 꿈에서 깨면, 기분이 묘했다. 거리에 아이를 안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도 별 감흥이 없던 나였다. 이 험한 세상에 아이를 하나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가, 신념을 굳혔던 나였다. 그 모든 것이 합리화였나? 나는, 사실 나는, 아이를, 나를 꼬옥 닮은 아이를, 원했나?
슬펐다.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왕창 흘렀다. 그토록 감당할 수 없었던 생리가 주는 고통에서 드디어 벗어났지만, 그에 대한 대가가 이제야 비로소 엄청나게 다가온 느낌이었다. 내가 그 고통을 오롯이 감내했다면, 꿈에서 본 아이를, 내 품에 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은 더 있었을 텐데.
이제는,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 나는 살고 있다.
꿈은 꿈이다.
가질 수 없는. 그러나 사무치게 가슴 저린,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