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다시 세우는 '작은 시작'

퇴사하고 나서 알게 된 것들 - (2) 내가 다시 살아난 순간

by 단짠노마드

퇴사 후 가장 먼저 무너졌던 것은 돈도, 계획도, 성과도 아니었다. ‘나’라는 사람이었다.


퇴사만 하면, 숨이 트일 줄 알았다.
시간이 생기고, 자유가 생기고, 나답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회사를 떠나고 보니 새벽 루틴도, 출근 준비도, 나를 지탱해 주던 ‘하루의 뼈대’가 모두 사라졌다.


침대에서 천장을 바라보는 시간이 어떤 날은 한 시간, 어떤 날은 반나절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나’로서가 아니라 ‘직함으로서의 나’로 살아왔다는 것을.


나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시간


퇴사한 순간, 내 이름 앞에 붙던 모든 호칭이 사라졌다.

“○○팀 과장님” 그 이름표가 떨어져 나가자, 나는 허공에 붕 떠있는 사람 같았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회사 안에서는 나름 인정받았던 사람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나를 설명해 주던 언어들이 모두 사라졌다. 직함이 사라지면 사람은 이렇게까지 흔들리는구나. 그걸 그때 처음 알았다.


멈추는 순간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들


사람은 달리다 멈추면 그제야 고통이 밀려온다.

퇴사 후 나는 그 고통을 한꺼번에 맞았다.

무기력은 생각보다 깊었고, 불안은 생각보다 집요했다.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는 날이 많았다.

SNS 속 타인의 삶은 모두 다 성공해 보였다. 남들은 다 앞으로 가는데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작아졌다.


다시 나를 찾기 시작한 조용한 순간들


그 무너진 시간 속에서도 작은 변화들은 아주 조용히 찾아왔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시작되지만 내 안에서는 중요한 일이 일어나던 순간들이다.

liana-s-4lPEgZfYt6Q-unsplash.jpg 이미지 출처 : Unsplash


#1. 집 공간 한편을 정리하던 날

어느 날, 몇 달 동안 닫아 둔 서랍을 열었다.

정리를 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손이 갔고, 그게 시작이었다.

퇴사 직전 급히 넣어두었던 메모와 수많은 명함들,

손때 묻은 사무용품들,

내 지난 시간의 흔적들이 차곡차곡 나왔다.

서랍 한 칸이 비워질 때마다 내 마음 구석도 아주 조금씩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비워내는 일은 언제나 마음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걸 그날 알았다.


#2. 가족과 단란하게 여행하던 날

그 시기 나는 어디에 있어도 온전히 그 자리에 있지 못했다. 불안이 늘 내 곁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딸들과 첫 서울 여행을 가던 날,
아이들의 웃음소리, KTX 창문을 스치는 햇빛이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머물러주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 나 아직 끝난 게 아니구나.”

그날의 온기와 바람 덕분에 내 안 어딘가 꺼져 있던 불이 아주 작게 다시 켜졌다.


#3. 카페에서 휴대폰 메모장을 열던 날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카페에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습관처럼 휴대폰을 열었다.

그날은 유독 조용했고, 괜히 마음이 조금 텅 빈 것 같아서 새 메모를 켰다.

첫 줄에 천천히 타이핑했다.

“요즘 나는…”

글자를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는 동안 오래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조용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보이는 글이 아니었다. 그저 내 마음을 놓아주는 기록.

그날 이후로 메모장은 나만의 조용한 일기장이 되었다. 나는 짧게라도 매일 마음을 적기 시작했다. 그 작은 기록들이 나를 다시 나에게로 데려오고 있었다.


나를 다시 살린 작은 행동들


퇴사 후, 나는 거창한 무언가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정부창업지원사업에 당당히 합격해서 사업의 첫 발을 떼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나를 살린 것은 서랍 하나를 비우는 일, 가족과 웃는 하루, 휴대폰 메모장에 몇 줄 적는 아주 작은 행동들이었다. 회복은 그런 작은 징후에서 시작된다. 소리 없이, 부서진 마음의 조각들을 조금씩 붙여 가면서.


그리고 나는 그 작은 순간들 속에서 아주 천천히,
다시 나를 되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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