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주 차
부모, 자녀, 임신, 출산, 육아... 실감 나지 않는 단어들이 한순간에 내 것이 되었다. 계획이 없었던 건 아니다. 우리 부부는 연애기간도 길고 즐거운 신혼생활도 1년 넘게 보냈기 때문에 조금씩 자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엽산도 챙겨 먹기 시작했다. '조심하지 말자', '가임기에 잘 맞춰보자' 정도였는데, 몇 달이 되어도 소식이 없길래 우리끼리는 '아기가 생기는 게 쉬운 게 아니었구나?', '우리 연애할 때 괜히 조심한 거 아니야?' 하며 웃곤 했다. 그렇게 서로 직장에서 바쁜 연초를 보내고, 아기가 생기면 놀러 가기 힘드니까 해외여행 다녀오자며, 도쿄로 떠나서 하루에 2만 보 씩 걷고는 기진맥진 돌아오고 며칠 후였다. 평소 같은 출근길이었는데, 출근시간이 빠른 나를 따라서 아내도 문을 나서길래 '?' 물음표로 바라봤다. 자기는 로봇이라 안 할 리가 없는데 소식이 없다며 집 앞 편의점에 테스트기를 사러 나간다는 것이다. 몇 번 그런 적이 있어서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웃으며 나는 출근하는 길이었는데,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벤트 좋아하는 아내도 그 순간에는 너무 놀라 바로 나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지금은 옆에서 깜짝 이벤트 못한 걸 후회하고 있다. 당시 무슨 이야길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전화를 끊고 한껏 상기된 나는 콧노래인지 뭔지 모를 소리로 난생처음 차에서 혼잣말을 하며 출근했다. 처음 알게 된 순간의 기분을 묘사하자면 사실 기쁘거나 걱정되거나 하는 감정은 아니었다. 단지 너무 신기했다. 아내는 왜 울지 않냐고 놀리는데, 그날의 기분은 나의 문장이 빈곤해서 도저히 글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출근해서 살며시 내일 오전에 병원을 좀 다녀오겠다고 반차를 올렸다.
아기는 “짠”하고 나타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우리가 너무 빨리 찾아간 것인지 아직 아기집이 보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아내는 걱정 로봇이 되었는데, 의사 선생님은 친절하지만 차분하게 “임신이신 것 같은데, 아직 극초기라서 안 보이는 것 같으니까 다음 주에 다시 봅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때 피고임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고, 아내는 바닥과 한 몸이 되었다. 의사 선생님이 그 정도까지 이야기하진 않았는데, 피고임에는 누워있어야 한다는 글을 본 아내는 그 말을 정말 그대로 실천했다. 이때가 4주 차였는데, 일주일이 1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아내는 궁금한 걸 정말 못 참는 성격이다. 같이 가고 싶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혼자 병원에 가서는 초음파 사진 한 장을 보내줬다. 직장에서 사진을 본 순간 정말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게 있음을 느꼈다. 아내와 기쁨의 전화를 하고 온 것이 오전이었는데, 그날 시간은 입사 후 가장 느리게 흘렀고, 일이 손에 안 잡힌다는 느낌을 처음 알게 됐다.
나는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아내와는 오래 연애했고, 만나는 사람들만 만나고, 집돌이고, 일도 익숙해지고 있다. 그런데 아이가 찾아와 매일 처음 느끼는 감정과 상황에 놓여있다. 하지만 싫지 않은 느낌이다. 오히려 설렌다. 그리고 내가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걱정도 되는 그런 하루들이었다. 아내는 계속 누워있다. 그게 너무 귀엽다.
9년 전에 아내에게 보낸 시라고 하기 민망한 문장을 적어본다. 그때 우리는 1000일이면 연애가 끝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긴 기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내는 여전히 내 옆에서 조잘조잘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벌써 만난지 12년이 지났고 여전히 그때의 내 생각도 유효하다. 아직 아내만큼 즐거운 대화상대는 없나 보다. 근데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왠지 생길 것 같기도..?
오래된 연인
1051일이나 사귀면 무슨 할 말이 있냐는
여자친구의 말에
대화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대화상대가 중요한 것이라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