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주 차
베트남의 더위는 더운 수준이 아니라 찌는 듯하다. 안타까운 스포를 하자면 수영장 물도 뜨겁다. 바다도 뜨겁다. 시원한 물에 풍덩하면서 피서를 즐기고자 한다면 우리나라 계곡이 좋을 것 같다. 지리산 최고. 하지만 우린 태교여행을 떠난 것이라 만족도 최고.
자 다시 여행 첫날로 돌아가보자. 베트남에 가는 비행기는 주로 밤 비행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퇴근을 하고 공항으로 가게 되는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기분이 묘하게 더 들뜬다. 정신없이 낮을 보내고 도망치듯 떠나는 게 꽤 낭만적이랄까. 출발 며칠 전, 의사 선생님에게 해외여행을 떠난다고 이실직고(?)하고 허락(?)도 받았지만, 임산부와 외국을 간다는 것은 꽤나 긴장되는 일이다.
아내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보자.
1. 넓은 좌석(앞자리)을 구매하자. 결과는 실패. 냐짱은 태교 여행, 가족 여행 등으로 유명하다. 당연히 나와 같은 비행기에 아이를 동반하거나 임신한 탑승객이 많다는 점을 간과했다. 한국인은 부지런하다. 하지만 우리 아내는 야무지다. 좌석 구매로 항공사에 문의를 했더니, 구매 가능한 좌석은 매진이지만 최대한 배려해 주겠다고 답변해 주셨는데, 정말로 앞쪽에 통로 자리로 미리 지정해 주셨다. 한국 기업 서비스 최고. 그리고 임산부라고 말하면 티켓에 스티커를 붙여주는데, 검색대도 따로 들어가고 탑승할 때 줄 안 서도 되고, 소소한 재미가 있다.
2. 압박스타킹과 종아리 마사지기를 준비하자. 불편한 자세로 4시간을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다리가 붓는다. 자주 일어나서 걸어주거나 압박스타킹을 신어주면 도움이 된다. 종아리 마사지기도 가져갔는데, 여행지에서도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3. 목적지가 200미터 이상이라면 그랩(택시)을 부르자. 이거는 농담반 진담반인 이야기인데, 베트남 날씨가 무척 덥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랩을 타고 다니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근데 아내는 의외로 괜찮다고 해서 조금 걸어 다녔다.
4. 상비약을 준비하자. 결과는 내가 먹었다. 임산부가 먹어도 괜찮은 소화제, 감기약, 진통제 등등 챙겨 갔으나, 아내의 컨디션은 아주 아주 좋았고, 배탈이 난 내가 소화제와 지사제를 먹으며 끙끙 앓아서 아내의 간호를 받았다. 미안해! 고마워!
아내와의 여행은 늘 재밌다. 혼자서 교토로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혼자 하는 여행도 재미있긴 했지만, ‘이 좋은 걸.’ ‘이 맛있는 걸.’ 중얼거리면서 같이 즐기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그렇다고 우리가 환상의 짝꿍은 아니다. 여행이라는 게 돈 쓰고, 시간 내서 가는 데다가 취향이나 호불호라는 게 완벽히 일치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서로 티격태격하는 게 당연한데, 그런 사랑싸움도 연애로 10년, 결혼으로 2년 차에 접어드니 서로의 스타일을 알게 됐고, 배려할 줄 알게 됐다.
나는 로맨티스트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보니 성격이 별로 안 좋은데 아내가 많이 배려해 준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 생활도 여행과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내가 고생하는 것만 보인다. ‘나는 너를 위해 이만큼 양보하고 고생하는데, 이 정도도 못 해줘?’라는 식이다. 근데 싸우고 반성하고 돌아보니 훨씬 많이 배려받고 있었다. 처음부터 속 깊은 100점짜리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밴댕이소갈딱지인 나는 자주 토라지고 억울해하고 사랑을 갈구한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오답노트 만들어서 고쳐 나가는 게 좋겠다고 마음먹는다. 수능과 달리 인생은 한 번뿐이니까. (근데 수능도 망쳤지만 재수는 안 했다.)
냐짱에 가면 담시장에 가보자. 물가가 저렴한 베트남에서는 돈 쓰는 재미가 있다. 저렴하다 보니 덤터기를 써도, 품질이 조금 안 좋아도 즐거운 추억일 뿐이다.
예를 들면
1. 2층에서 아내가 한참을 실랑이하여 우리 딴에는 가격을 아주 많이 깎아서 산 라탄 가방이 1층의 다른 상점에 가보니 처음 부르는 가격이었다거나
2. 비싸다며 다른 가게 가겠다고 시늉하면서 싸우던 게 알고 보니 500원 차이였다거나
3. 나이키 반바지를 5천 원 주고 사서 너무 좋다며 극찬하고 돌아온 날 세탁기를 돌렸더니 "NI--"가 됐다거나
4. 조카들 옷을 잔뜩 사 와서 Felx 한다거나 (스투시 옷이었다. 물론 짝퉁)
5. 망고젤리를 잔뜩 사 와서 주변에 나눠주고도 남아서 처치곤란이라거나
6. 마사지를 받고 거스름돈은 팁이라며 거들먹거리며 나왔으나 500원인가 1,000원이었다거나
7. 리조트 수영장 의자에 누워 맥주를 마시고, 레스토랑에서 햄버거를 사 먹고 배달음식을 마구 시켜 먹는다거나
8. 야시장에서 진주 팔찌를 살지 말지 망설이며, 그냥 가려고 하니 계속 깎아줘서 도대체 원가가 얼마인지 궁금했다거나
9. 그 후론 가는 척하는 게 정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귀국하는 날이었다거나.. 아무튼 재밌었다.
아내는 나만 보면 무언가 사주고 싶나 보다. 나는 물욕이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평소 쇼핑도 일절 안 한다. 반면에 아내는 쇼핑을 참 좋아한다. 예전엔 참 사고재비다라고 핀잔 아닌 핀잔도 준 적이 있는데, 지속적인 관찰 결과로 보니 막상 사는 거는 별로 없다. 항상 옷이나 신발, 가방, 화장품 등 이것저것 보고 있는데, 막상 "여보 필요하면 사. 그냥 사. 막 사."라고 해도 주문하는 경우는 드물다. 다이소 가서 사거나, 올리브영에서 올영데이라며 엄청 할인하는 날 산다거나. 백화점이나 아웃렛에 가서 입어보곤 이뻐서 "사자. 사자." 해도 똑같은 제품 인터넷에 치면 더 싸다며 제품명만 보고 나온다거나 그런 식이다. 왜 진작 몰랐을까.
베트남 가서도 마찬가지다. 물가도 싼데, 이것저것 사라고 해도 나보고 평소 옷 안 사 입는다며 내 운동복만 잔뜩 샀다. 평소 같으면 비싸다고 절대 안 산다고 도망치는데, 그러면 서운해하는 아내를 알면서도 나는 참 뭐 사는 게 싫다. 돈도 써본 사람이 잘 쓴다고. 태생이 그런가 보다. 하지만 이번엔 짝퉁 나이키가 단돈 5천 원이니 쿨하게 알겠다고 다 사버렸다.(사실 조금 실랑이가 있긴 했다.) 미안해서라도 다시 열심히 운동해야겠는데, 설마 큰 그림은 아니었겠지. 내가 평소에 눈치를 준 건가 돌아보게 된다. 옷 안 사줘서 미안하고 옷 사줘서 고맙습니다. 내가 다 사줄게!!
우리의 여행은 역할 분담이 확실하다.
아내는 가고 싶은 곳을 찾고 계획을 세운다. 나는 짐을 들고 길을 찾는다.
그리고 아내는 여행 중간중간 내가 좋아하는 일정을 잡아준다. 예를 들면 돈까스 맛집을 찾아준다거나 유적지와 같은 역사 깊은 장소에 가는 일정을 잡아주는 식이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냥 길만 찾아주고 무료 맞춤형 패키지여행을 하는 셈이다. 길도 요즘엔 구글이 찾아주는데 말이다. 아내가 길치라서 다행이다. 나는 그저 화살표를 보고 따라갈 뿐인데, 어쩜 이렇게 길을 잘 찾냐며 구름 위를 태워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아내가 나를 찬양하게 된 몇 번의 계기가 있는데, 우리는 그걸 진주 남강 유등축제 버스 막차 사건과 파리 신혼여행 지하철 파업 사건으로 부르곤 한다. 내가 생각해도 꽤나 듬직했던 날이다.
쓰다 보면 여행기만 몇 페이지가 될 것 같아서 간단히 나트랑 총평을 남기자면
- 음식은 크게 인상 깊지 않았다. 글로벌화는 무섭다.
- 마사지는 좋았다. 가격은 대부분 저렴하니 너무 싼 곳은 비추다. 가격도 적당하고 시설도 좋은 곳이 좋다.
- 휴양을 목적으로 가다 보니 처음 시내 구경하던 1.5일을 제외하고는 리조트에만 머물렀다.
- 우리는 하루에 2만보씩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여행 스타일이라 시내 구경할 때가 즐거웠고, 수영도 별로 안 좋아해서 리조트는 조금 심심했다. 그래도 날씨 좋고 리조트 풍경이 아름다워서 이쁜 사진 많이 찍어 만족이다. 관광지라고 할만한 곳엔 가지를 못했다. 그래도 별로 아쉽지는 않다.
- 아내도 나도 동남아 보다는 일본 여행이 재밌다며 (소곤소곤) 둘이 속삭였다.
- 우리 아이랑은 어디로 떠나볼까.
여행 다녀와서 바로 병원에 가봤는데, 건강하게 잘 있었다. 초음파를 보자마자 엄마를 정면으로 보고 있어서 아내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우리 딸 여행 재밌었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