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주 차
우리 아이의 혈액형은 무엇일까?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먼저 아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아내의 단골 질문 중 하나가 “혈액형이 뭐야?”였다. 처음 만났을 당시에 나는 그게 스몰토크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혈액형에 따른 성격 분류를 굉장히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AB형이라고 답했는데, 어릴 때부터 AB형이라고 하면 듣는 말이 있었다. AB형은 천재 아니면 바보라더라. AB형 4차원이라더라. 사이코패스다(?). 으레 듣는 농담이라 웃어넘길 준비를 하는데, 아내의 대답은 의외였다.
자기랑 잘 맞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내는 혈액형으로 하는 농담 따먹기 정도가 아니라 궁합까지 보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다. 자기는 무슨 형 남자랑은 안 맞고 무슨 형 여자는 자기랑 안 맞고 무슨형이랑은 이렇게 잘 맞고 저렇게 안 맞고... 쓰다 보니 처음 들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떠올라 웃음이 난다. 아내의 귀여운 포인트는 무엇이냐면, 당시에는 굉장히 신뢰했지만 MBTI의 등장과 함께 혈액형 이야길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요즘은 MBTI를 신봉한다.
아내는 A형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우리 아이는 A형이거나 B형이거나 AB형일 수 있다. 아내에게 이걸 설명하는데, 왜 O형은 안되냐고 태연하게 묻길래 나는 웃으면서 도대체 학창 시절 과학시간에 무슨 딴짓을 한 거냐고 놀렸다. 아내의 이런 귀여운 백치미 혹은 말실수 모음집이 있는데, 다음에 한번 정리해 봐야겠다.
아내의 MBTI는 ESFJ이고, 나는 INTJ이다. 가만 보면 MBTI는 혈액형과 달리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학문적으로 만들어진 지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아내와 나는 성격이 정반대다. MBTI로 전부 설명할 수는 없지만, J 말고는 공통점이 없으니 반대인 게 납득이 된다고나 할까. 아내에게 우리 아이의 MBTI를 물었더니, 우리 둘을 섞으니 ENFJ일 거라고 한다. MBTI를 혈액형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점도 귀엽다.
성격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혈액형처럼 타고나는 기질일까. 아니면 성장기의 주변환경이나 경험이 중요할까. 성격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래도 학창 시절의 경험이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내 성격은 고치고 싶어도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내 성격이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이라 그런지 몰라도 100% 유전도 100% 환경 탓도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임상 증거라고는 나 하나뿐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성격을 꽤나 닮았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늘 아빠 닮아서 걱정이라고 했다. 아버지조차도.. 그런가 하면 나는 어릴 적부터 어떤 점들은 부모님 안 닮아야지 하면서 의식적으로 생활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받은 영향도 크다. 친구 잘 만나야 한다는데 친구는 그다지 내 성격에 영향을 준 것 같지는 않다. 친구일 때부터, 연애할 때부터 아내의 멋진 성격을 닮으려고 노력했고, 또 아내가 좋아하거나 바라던 내 모습이 있었는데, 의식적으로 그러려고 노력하다 보니 그렇게 변한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취미나 취향에 따라 조금씩 성격이 형성되어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래서 유년기 친구들을 만나면 되려 너 성격이 조금 변한 것 같다는 이야길 듣기도 한다.
내가 아버지를 쏙 빼닮아서 부모님이 놀랐던 사연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 때였는데, 할머니의 농사를 돕던 부모님을 따라 남해 할머니집에 간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으로 예전에는 재밌던 농촌이 지루하게 느껴졌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엄마에게 버스비를 달라고 했다. 버스를 타고 삼천포까지 혼자 가겠다고 한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돈도 넉넉하게 받을 걸 딱 버스비 정도만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마을을 벗어나 버스를 탔다. 조금 가다가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는 버스를 보고는 놀란 마음에 황급히 내렸다.
그때 당시 나는 버스를 타면서도 '이 버스 삼천포 가나요?' 라던지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이 일을 물어서 해결할 낯이 없을 정도로 소심했다. 일단 내려버린 나는 무작정 걸어서 삼천포까지 갔다. 가다가 아버지 차 같은 게 보이면 놀라서 숨었다. 버스 잘못 타서 이 꼴이 된 걸 들키면 혼나겠다고 생각한 거다. 그만큼 겁도 많았다. 그렇게 걸어서 5시간 만에 집에 도착했다. 누나들은 녹초가 되어 혼자 집에 온 나를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나만이 간직한 비밀이었다.
이 이야기를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공개했다. 내 말을 듣던 부모님은 절망했다. 어떻게 이리도 아버지를 쏙 빼닮은 거냐고 말이다. 남자가 배포가 없냐고.. 아버지도 대학시절인가 차비가 모자라 부산 남포동인가 어디에서부터 노포까지 걸어간 적이 있다는 이야길 듣고 소름이 돋았었다. 나의 커밍아웃을 들은 아내는 '아니 도대체 왜 그랬어??"라고 눈이 동그래졌더랬다. 아무튼 잠깐의 추억 여행에서 다시 돌아와 이야기하자면, 우리 딸은 엄마 성격을 닮았으면 좋겠다는 게 결론이다. 나머지 50% 유전이 아닌 성격 형성에는 이 아빠가 힘 받쳐 노력할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