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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케맨 Aug 06. 2024

두구두구, 우리 아이의 성별은

16주 차

2차 정기검사 날이었다. 휴가를 쓴 나와 아내는 함께 눈을 뜨고 평소보다는 조금 빈둥거리다가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1차 정기검사와는 다르게 오늘은 설렘이 가득했다. 드디어 우리 아이의 성별을 알 수 있다는 점과 1차 검사에서 건강하게 잘 있다는 이야길 들어서인 듯하다. 너무너무 같이 보고 싶었는데, 임신 사실을 알려 줄 때 이벤트를 못했다는 이유로 아내는 자기 혼자만 듣고 나오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저녁에 이벤트를 해주겠단다. 결국 나는 오후에 출근을 했다. 사실 바쁜 시기라 나가서 일을 봐야 할 것 같아 괜히 미안해하고 있었는데, 이벤트 해줄 거니까 필요 없다고 가라는 쿨한 그녀. 아니면 속 깊은 배려였을까.


아무튼 같이 대기하다가 아내 혼자만 진료실로 들어갔다. 왜 같이 안 들어가냐는 간호사 선생님의 손짓에 "성별은 아내 혼자 듣겠다고 하네요"라고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한참 진료를 보고 나온 아내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같이 나온 간호사 선생님이 다음 일정을 설명해 주다가 무심코 "아빠도 딸을 원했어요?"라고 했다. 그때 아내가 황급히 말을 가로챘지만 사실 나는 들었다. 아내가 나를 보며 "들었어?"라고 묻는데, 못 들었다고 했다. 간호사 선생님은 당황했는지 황급히 남은 말을 마무리하고 사라졌다.


우리는 같이 주차장으로 걸어갔는데, 아내는 계속 "들었지?" 하다가 갑자기 사실은 일부러 그런 거라고 했다. 간호사 선생님과 짜고 친 고스톱이라는 거다. 나도 생각한 게 아니 분명 들어갈 때 아내가 이벤트를 해준다고 했는데, 나와서 왜 말했을까 싶었다. 아내가 검사하면서 남편에게 이벤트 해준다고 이야기까지 했다는데. 아무튼 아내는 연막작전을 펼친 거라고 웃었다. 그렇게 나는 아내와 점심을 먹고 출근을 했다. 오후에는 바빠서 정신없이 일을 했는데, 그 와중에도 계속 생각이 나서 혼자 미소 짓다가 다시 일하기를 반복했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도착하니, 아내는 언니까지 동원해 풍선부터 시작해서 아주 이벤트 대작전을 펼쳤다. 어떤 이벤트냐 하면 검은색 풍선에 아들이면 파란색 딸이면 분홍색 종이가루를 잔뜩 넣어서 내가 터트리면 알게 되는 식이다. 함께 밥을 먹는데, 처형이 먼저 식사를 마치고 풍선에 가루를 숨어서 넣다가 갑자기 공기가 빠졌는지 안에 넣던 가루가 거실 쪽으로 흘러나왔는데, 흘깃 보니까 분홍색이었다. 그때 황급히 치우던 손길에 나는 또 못 본 체했다. 아내가 너무나 태연하게 연막이라고 해서 진짜 아들인가 하며 확신이 없었는데, 그것까지 보니 딸임을 직감했다.

속으로 얼마나 좋았는데, 티를 내지 못하고 얼른 밥을 다 먹고 이벤트를 시작했다. 두구두구하면서 풍선을 터트렸는데, 역시나 분홍색이었다. 거의 90% 확신하고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하니 더 기쁜 마음이었다. 얼싸안고 딸이구나 하면서 좋아했다. 아내는 아들 나는 딸이기를 내심 바랐었는데, 성별을 확인하니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건 마찬가지였다. 사실 성별은 상관없는 거였다. 나는 더 좋았지만 말이다. 아들이면 같이 목욕탕 가는 게 꿈이었는데, 그거 하나는 아쉽다. 아내는 날 닮은 아들이랑 데이트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건 아쉽겠다. 이제는 딸이랑 이쁜 옷 맞춰 입고 친구처럼 놀러 다닐 생각에 나보다 더 들떠있다.

의료법 20조 2항에는 32주 이전 성별고지를 금지하는 내용이 있다.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해당 조항에 대한 위헌 결정이 내려져 즉시 무효가 되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러한 법률이 아직까지 있다는 게 의아했다. 요즘에는 오히려 여아선호사상인 것 같은데 말이다. 원치 않는 임신 때문에 낙태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성별로 낙태를 결정한다는 이야기는 요즘 세대에서 들어본 적이 없다.


아버지 세대의 우리 집은 남아선호사상이었다. 내 위로 누나가 세명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래서 참 기분이 묘하다. 덕분에 내가 세상에 태어나 너무나 감사한 일인데, 아들을 낳지 못해 받았을 엄마의 설움에는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가지고 성별을 확인하고자 (그때 당시에만 해도 성별은 절대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한다.) 용하다는 곳(?)(성별을 가르쳐 주는 곳)을 찾아 부산까지 왔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고, 어머니 혼자 병원에 다녀왔다.


당시 그곳에서 성별을 알려주는 방법은 딸이면 진료비만 받고 아들이면 10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있던 주차장으로 걸어와서 아버지에게 "여보 병원에서 10만 원을 더 달래요." 하며 돈을 더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때의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원체 감정표현이 없고 속마음 이야길 잘 안 하시는 어머니라 물어도 대답이 없으시다. 아버지는 아들 낳은 게 참 좋으신가 보다. 나는 차별 없이 똑같이 큰 것 같은데, 아니 오히려 손해 보고 자란 것 같은데, 누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어머니의 무뚝뚝함은 차별하지 않겠다는 어머니만의 교육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무서움은 나라고 피해가지는 않았다.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이 어린 막둥이 장손으로 나도 모르는 혜택을 많이 받으며 자란 것 같다. 세상에 영원한 사상은 없나 보다.


아! 그리고 아내는 성별을 예측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했는데, 인터넷 맘카페(?)에서 용하다는 유저에게 각도법을 의뢰하기도 하고, 배 모양으로 추측하기도 하고, 과일이 당기고 육류가 싫은 거보니 딸 같다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변에 물어보면 백이면 백 딸일 것 같다고 하는데, 그런 게 어떻게 느껴지는지 참 신가 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니 벌써 2차 정기검사를 받는 날이 오다니 시간이 안 가는 것 같으면서도 빠르게 지나간다. 아무튼 우리 공주님 얼른 보고 싶다!! 

의사 선생님 왈 "공주님 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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