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당케맨 Jul 16. 2024

인사이드아웃2와 버지니아 울프

14주 차

아내와 '인사이드아웃2'를 보러 갔다. 영화관에 절반은 아이였고, 나머지 절반은 함께 온 엄마 아빠였는데, 나는 그 영화를 보다가 눈시울을 붉혔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와중에도 말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후회하던 내가 이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그런 복잡한 감정에서 나온 눈물이었다.


앞으로 아이에게서 늘 배우기만 하겠지만, 가끔 아빠 말을 들어준다면 알려주고 싶은 문장이 있다.

무언가 할 수 있다면 스스로 하는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기 전날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소설집 속에서 만난 문장이다. 소설의 내용은 여성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영화를 보며 이 문장이 떠올랐다. 아마 사춘기가 찾아온 주인공이 역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힘도 다른 누구의 도움이 아니라 '스스로'였기 때문일 거다. 디즈니의 기발한 상상력으로 만든 살아 있는 감정들이 해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감정들 역시 자신이다. 기쁨이는 '자아'를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눴지만, 사실 모든 기억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아를 형성한다. 우리 아이 역시 감정이 자아를 지배하지 않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에게 딱히 가르치고 싶은 건 없다. 그렇다고 욕심이 없는 건 아니다. 착하고, 활동적이고, 공부도 잘하고,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속이고 싶지는 않다. 가르쳐서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는 말이 더 타당하겠다. 그래도 우리 부부가 공통적으로 바라는 점은 아이가 커서도 쭉 우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 아내 말로는 '딸 같은 아들'이라길래. '그럼 딸이면?'이라고 되물었더니 '딸 같은 딸'이라나. 아마 딸이면 본인 같기를 바라는 거다.


자신이 없는 이유는 나 역시 내 마음대로 하는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 갈 때면 문과와 이과라는 개념이 완전히 사라지겠지만, 나는 문과와 이과를 완전히 나누던 마지막 세대였다. 나는 문과를 선택했고, 부모님은 이과를 강요하셨다. 인생은 기술! 취업은 이과!라는 공식을 아버지는 아마 '나를 위해' 고집하신 걸 거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는 감성적이고, 내가 군대에 있을 때는 눈물 나도록 감동적인 장문의 편지를 시처럼 보내주신 분이다. 아버지를 쏙 빼닮은 나는 다분히 문과적 성향이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학과 과학을 정말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과는 기계적이고 문과는 감성적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분법적 사고를 했다는 게 기가 막힌다. (정말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고?..) 나이가 드는 게 생각보다 근사한 일이다. 조금씩 시야가 넓어지고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이니까.


마찬가지로 문과를 선택한 나는 대학을 갈 때도 취업을 할 때도 그런 일차원적인 생각에서 이과를 선택하지 않은 나를 원망했다. 결국 선택도 본인 몫이고 후회도 본인 몫이다. 아이에게 강요보다는 대화를 많이 하고 싶다. 나는 존경받고 싶지만 그만큼 친구가 되고 싶다. 나의 성공담만큼이나 실패담을 많이 이야기해주고 싶다. 지금에 와서야 깨달은 사실을 사춘기 아이에게 해줘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고 말 거다. 내가 당시에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떠올려봤다.


다른 부서에 있을 때, 같이 일하던 팀장님과 점심시간에 산책을 한 적이 있다. 팀장님이 고민처럼 나에게 이야기한 것은 아들과의 관계였다. 아들과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고등학교 이후로 아이는 내 마음과 다르게 계속 서먹 해지고 멀어져 간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나에게 어떤 조언을 바라고 하신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른다. 단지 신입사원이던 내가 그나마 자식과 가장 가까운 또래였을 테니까. 나에게 아들을 투영해서 속에 있는 이야길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나의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나는 사실 유년시절 부모님과 (특히 아버지와) 전혀 친하지 않았으나, 나이가 먹고 그러니까 지금쯤 되니까 다시 가까워지고 있다고. 조금 더 자주 전화드리고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한다고. 그것은 내 안에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한다. 팀장님 말로는 어릴 때는 가깝게 잘 지냈다고 한다. 그러면 왜 변하게 되었는지 그 속사정은 알 길이 없다. 애초에 나는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와 늘 거리를 두며 자랐으니 말이다.


팀장님도, 우리 아버지도, 주인공의 부모님도 본인이 생각하고 준비했던 대로 자신의 아이는 전혀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는 '스스로' 멋지게 자랐다. 아이가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사랑하는 마음만 잘 전달한다면 알아서 잘 자라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인 육아를 떠올렸다. 이제는 '나'라는 존재의 정의가 끝나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빠가 되고 아직도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에 설레는 날이었다.



아이에게

너에게 다가오는 감정들을 외면하지 말아 줘. 그 순간에는 너를 힘들게 하고, 괴롭힐지도 몰라.

하지만 결국 그 순간들이 모여 너를 너답게 만들어 줄 거야.

너를 사랑해 줘.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만큼 타인을 사랑해 줘.

엄마 아빠도 건강한 자아를 가진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사진 = 네이버 영화 인사이드아웃2 포스터

이전 06화 1차 기형아 검사를 받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