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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케맨 Sep 19. 2024

태동, 처음이 주는 행복

21주 차

첫 태동을 느꼈다. 둘만 있던 공간이 갑자기 셋이 되었다. 딸이 속삭인다. "나도 여기 있어요!" 계속 셋이었는데, 실감하지 못했다. 미안해 우리 딸. 아내의 배에 손을 얹고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으니 시간들이 지나간다. 둘이서 이 집에 처음 입주해서 같이 청소를 하고, 텅 빈 공간에서 결혼을 준비하고, 아내가 해준 요리를 손뼉 치면서 먹고, 가전과 가구가 늘어나고, 함께 웃고, 울고, 싸우고 사랑한 시간들이. 이제는 셋이서 보낸 시간들로 쌓여 가겠지.


첫째라 태동을 빨리 못 느낀다던데, 특히 아빠가 배를 만져서 느끼려면 아직 멀었다던데, 우리 딸은 힘도 좋지. 엄마의 발차기를 닮았나 보다. 태동이 강렬했던 이유는 아내가 "이게 태동인가. 뭔가 이상해. 만져봐."라며, 둘이 손바닥을 포개어 배를 만진 바로 그 순간에 손바닥을 꾹 누르는 듯이 세게 태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서로 바라보곤 5초 후, 깔깔대며 웃었다. 거짓말처럼 그때의 강력한 한방 후로는 태동을 느낄 수가 없었다. 슬프다. 나중에는 그만 좀 차라고 할 테지만, 요즘 우리 둘은 이 공간이 셋이라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끊임없이 말을 건다.


우리는 연속을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순간을 산다. 기억이라는 것이 그렇다. 지나고 나면 날아가 버려서 순간만 남는다. 이 세상은 수많은 처음으로 구성된다. 잊지 못하는 기억이 대부분 처음인 까닭이다. 마지막은 싫다. 마지막은 늘 슬픈 기억이기 때문이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은 경제학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 적용된다. 하지만 자녀를 통해 받는 부모의 행복감만큼은 이 법칙에서 예외일 것 같은데, 내 생각이 맞았는지는 죽기 전에 유언으로 말해줘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난 사진을 좋아한다. 사진도 그렇다. 여행을 다녀와 앨범을 보다 보면 좋았던 기억에 다시 떠나고 싶어 진다. 너무 추워 오들오들 떨거나 너무 더워서 짜증이 났던 그런 시간들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 잊어버리고, 온도를 뺀 사진 속 순간에 우리는 너무나 행복하고 아름답다. 아내와 같이 간 여행지만 그리운걸 보니 아내 덕분인 것 같기도 하다.


여행지에서 우린 종종 싸웠지만, 최악의 여행,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여행은 없다. 결혼 생활도 연애도 우린 꽤 많이 싸웠지만, 결혼한 걸 후회하지도 아내를 만난 걸 후회하지도 않는다. 정말 사랑의 힘이란 위대한걸? 짧지만 내가 느낀 삶이라는 게 생각보다 복잡하지가 않아서 그러니까 수학으로 치면 곱하기, 나누기, 기하, 벡터, 미분, 적분이 아니라 그냥 더하기 빼기라서 행복한 기억과 안 좋은 기억 중에 행복한 기억이 더 많으면 행복한 삶이 된다.


모든 부모들이(언제나 예외는 있지만) 아이를 가지고, 키우며 이런 행복한 순간이 너무너무 많이 쌓여서 아이가 가끔 말을 안 듣고, 부모를 힘들게 해도 절대 아이 가진 걸 후회하지 않는 이유가, 우리 아이가 세상에서 제일 이쁜 이유가 이런 삶의 간단명료한 방정식 때문일 테다. 고작 태동 하나로도 세상을 가진 아빠가 한 밤중에 든 생각이다.  끝.

한 겨울에 아내와 처음 가 본 오사카 여행. 너무너무 추웠지만 그립다.
일본어 잘하는 아내의 위풍당당한 모습. 나는 따라만 가면 오케이.
대학교 뚜벅이 시절 제주여행. 카페에 갔다가 태풍을 만나 비바람 맞으며 숙소로 복귀. 다음날 비행기도 취소되어 대구 가는 비행기에 급하게 몸을 맡겼지만 지금은 즐거웠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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