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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케맨 Oct 08. 2024

우리 딸~ 얼굴 좀 보여줘

22주 차

정밀초음파를 하는 날이다.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가는 날이면 늘 긴장과 설렘이 공존한다. 그동안 얼마나 더 컸을까 궁금하면서도, 어디 아프진 않을까 걱정되는 까닭이다. 정밀초음파를 하게 되면 평소 주기적으로 담당의사 선생님을 만날 때와는 다르게, 영상의학과로 가서 꽤 오랫동안 이곳저곳 자세히 우리 아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입체 사진으로도 우리 딸을 보여줘서 더 특별하다. 평소에는 사진만 보다가 영상통화를 하는 기분이랄까. 실제로 만나게 되면 어떤 기분일지 아직은 상상이 잘 안 간다.


이번에 초음파를 봐주신 선생님은 조용히 영상을 봐주셔서 더 긴장됐다. 저번에 볼 때는 건강하네요. 잘 크고 있네요. 정상이네요. 이런 추임새를 계속해주셔서 안심이 되면서 봤는데, 이번에는 되게 오래 봐주셨는데 별다른 말이 없어서 뭔가 문제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어 걱정이 됐다. 결론은 건강히 잘 크고 있었다. 다만 무게 등으로 봤을 때 1주 정도 성장이 늦지만 크게 문제 되는 차이는 아니라고 했다. 휴. 다행이다.


그리고 오래 본 이유도 있다. 두 달 전과는 달리 우리 딸이 많이 커서 초음파를 보는데 꽤나 애를 먹었다. 얼굴도 안 보여주고, 손가락, 발가락도 요리조리 숨어서 기형아 검사를 위해 확인해야 할 화면을 잡아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1차와는 달리 조금 더 세밀하게 보는 것 같다. 장기들도 하나하나 보면서 말이다. (끝나고 찾아보니 우리 딸만 그런 게 아니었다. 휴. 다행이다.)


우리 딸은 얼마나 부끄럼쟁이인지 얼굴을 도통 보여주질 않아서, 결국 의사 선생님 면담을 하고 밖에서 조금 걷다가 다시 한번 보자고 하셨다. 우리는 부랴부랴 물도 마시고, 초코 우유도 마시고, 병원 복도를 이리저리 한참 걸었다. 결과는 반만 성공했다.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반 쪽만 입체 사진을 찍었다. 아내는 보자마자 나와 똑같다며 빵 터졌다. 나는 이런 쪽으로는 둔해서 "그런가?" 하면서도 마냥 귀엽기만 했다.

병원을 옮겨서 집에서 거리는 조금 멀어졌지만, 아내는 여러모로 대만족인 것 같다. 아내 마음 편한 게 최고다. 병원 규모도 훨씬 큰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여러 진료과 선생님이 있으니 안심이 된다고 한다. 이전 병원에서는 남자 의사 선생님이었는데, 여자 선생님으로 바뀌니 공감도 훨씬 잘해주는 것 같고 상담도 만족스러워한다. 특히나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의료기기가 더 좋은지 화질이 선명하다며 아주 만족해한다. 귀엽다. 내친김에 조리원도 상담하고 예약했다. 창 밖으로 탁 트인 풍경을 볼 수 있어서 덜 답답할 것 같다며 좋아한다. 다행이다. 임신한 아내를 둔 남편은 매일매일 이적의 다행이다를 부른다. 아내도 걱정. 아이도 걱정. 아내보다 더 찐 내 뱃살도 걱정이다. 그래도 하루하루 무탈하게 넘어가는 중이니 참 다행이다.


나에게 데이터베이스는 아내뿐이지만, 아내를 만나 터득한 삶이 행복해지는 요령이 있다. 아직도 익히고 있어서 완벽하진 않다. 그것은 바로 눈치다. 사랑 덕분에 사회생활에서도 덕을 본다. 상대방의 생각을 살피는 것은 되게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방법이기 때문이다. 눈치를 본다라는 게 썩 좋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는 것 같다. "왜 그렇네 눈치를 봐?"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도 간혹 주변에서 "너 엄청 잡혀 사는 것 같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딱히 발끈하지 않고 헤벌레 웃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 마음 몰라주고 남들 앞에서 멋진 척해봐야 나중에 밥도 못 얻어먹는다라는 삶의 지혜를 터득했나 보다.


때때로 눈치 보지 말고 살자가 권해지기도 하는 듯하다. 근데 '눈치 보지 않는다.'를 제멋대로 '도전, 열정' 등으로 치환해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살아보니까 눈치 없는 사람이랑 있는 것만큼 피곤한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생 붙어 지낼 부부 사이에 눈치는 필수다. 싸울 때, 내가 화내는 대부분의 이유가 역지사지였다. "입장 바꿔 생각해 봐. 너는 되고 나는 안돼?"라는 식이다. 돌이켜 보니 나는 당신의 눈치를 살피는데, 왜 당신은 내 눈치를 안 봐라는 심정이었나 보다. 근데 아내는 누구보다 (어떨 때는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정확히 알고 챙겨주는 사람이다. 화가 나면 그걸 인정하기 싫은 건지 그런 모습을 잊어버리는 건지 지나고 나면 부끄러운 경우들이 종종 있다.


이제 눈치 볼 사람이 한 명 더 생겼다. 상대방의 마음을 잘 헤아려 좋은 남편과 아빠가 될 수 있을지 개봉박두다. 혹시 나중에 눈치 없는 행동으로 화를 돋우더라도 한 번은 용서해 달라는 마음으로 무려 2015년에 전여친(현아내)에게 쓴 시 한 편을 적으며 글을 마친다. 군 전역 후, 복학해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딸 아빠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겠지? 그리고 엄마가 분홍색 옷을 많이 사줘도 이해해줘야 한다. 이 시를 써서 보여줬을 때, 부끄러워하며 웃던 아내 모습이 떠오르는 날이다.


분홍색

어떤 여자가 자기는
분홍색을 좋아한다고 하면
아.. 이 여자는
분홍색을 좋아하는구나가 아니라
아.. 여자친구도
분홍색을 좋아하는데라고 생각한다.

이런 게 사랑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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