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무구함과 소보로』 읽어보기
1. 글자 하나에 오래 머물도록 하는 힘
2. 작품 읽어보기
3. 시를 읽는다는 것은,
임지은 시인의 『무구함과 소보로』(문학과지성사, 2019)를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전시회'라는 다소 진부한 표현이 떠오르는 것이 애석하다. 평소에는 그 존재조차 체감하지 못했던 사소하고 범상한 순간들이 언어로 포획되어 훤하게 걸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포획이라는 표현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주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건져 올린 순간들일 테지만.
이 시집을 관통하며 수없이 되풀이되는 명사형의 시적 대상이란 밀려 나간 것, 잘려 나간 것, 즉 추방당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오렌지, 바나나, 딸기, 코끼리, 물고기, 거짓말, 무구함, 소보로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시적 대상은 분명한 윤곽과 독특한 완결성으로 읽는 자가 손쉽게 그들을 읽어버린 후 지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가로막고 있다. 이것은 시인이 세상에 던지는 질문인 동시에 세상이 받아내야 하는 대답이다.
- 장은정(문학평론가) 해설 中
해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임지은 시인의 언어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자꾸 뒤돌아 보게 하는 힘이 있다. 혹은 지나가지도 못한 채, 단어마다 오래도록 머물며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한다. 명사형으로 나열된 시 세계는 자그마한 의심의 여지마저 없애 버릴 정도로 견고하고 촘촘하게 묘사되는데, 시인이 펼쳐 놓은 단어들을 되새기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행과 연을 지날 때마다 그 의미를 더해 가는 시인의 단어들은 더없이 일상적인 사물 같으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임지은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남다른 관찰력에 감탄하면서도 관찰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본질을 단번에 꿰뚫는 통찰에 감명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꾸만 펼쳐 볼 수밖에 없는 시집이 바로 『무구함과 소보로』이다.
몇몇 사람이 모였다
대화의 주제는 여행 가고 싶은 도시
주로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안움직, 씨는 안 가본 도시의 이름을 적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갈 것 같았고
자칭 여행가인 비정규직, 씨는
자주 이직해야 하는 탓에
출근마저 여행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한 번도 말라본 적 없는 먹음직, 씨는
77사이즈가 보통 체형인 도시로
여행 가는 것을 선호했고
종일 환자들의 썩은 이를
들여다보는 전문직, 씨는
이제 그만 다른 것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른 도시는 필리핀
에서 다 함께 먹는 머핀
위험하다면 잡아당겨 안전핀
뮤직, 씨가 온갖 핀으로 플로우를 타는 동안
발등의 불을 끄느라 뒤늦게
도착한 정직, 씨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스위치를 찾으려 했지만
그런 건 있을 리 만무했고
비 오는 날 우산이 없던
지지직, 씨는 공항으로 마중 나오라는
문자 대신 텔레파시를 보냈기에
속옷까지 전부 젖었다
내일은 이어폰
을 꽂고 출근할 테지만
오늘은 필리핀에 관한 시를 썼고
엊그제는 죽은 단어를 핀셋으로 건져 올렸다고
말한 이가 있었으니
아직 시인이란 꿈을 보관 중인 간직, 씨였다
이 시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시다. 시인의 위트에 웃음을 한가득 짓다가도 나 자신을 '○직, 씨'로 명명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꽤 오랜 시간 골몰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나직, 씨가 어울릴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직한 것을 좋아한다. 나직하게 내려앉은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 나직한 언덕에 올라가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나직한 양옥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들려오는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유달리 나직하게 떠다니는 여름날의 먹구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하늘로 치솟기만 하는 이 시대의 것들은 나직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오히려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에 나직한 것들을 자꾸만 그리워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일상을 거스르는 행위에 몸을 던져 언제까지고 헤엄칠 수 있는 것이 시인의 역량이라면, 시에 등장하는 간직, 씨는 이미 훌륭한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단어를 건져 올려 곱게 묻어 주는 것,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아든 ‘시 쓰기’를 통해 그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 간직, 씨가 이미 살아내고 있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시대의 한 귀퉁이에서 나직한 것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시대에 여전히 시를 읽고 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곤 한다. 뭐든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 시를 읽고 쓰는 것은 존재의 한계를 벗어나려 하는 안타까운 몸부림의 일환 같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소명 같기도 하다.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던 어느 순간을 언어를 통해 가장 완벽히 그려내고자 하는 도전,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서 계속 새로워지고자 하는 시도가 가장 잘 드러난 문학이 바로 시가 아닐까.
그래서 대형 서점 시/에세이 코너 근처를 하염없이 서성이는 사람들은 꽤나 비장한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해 본다. (왜 서점의 시 코너는 늘 발길이 안 가는 구석에 있는지!) 수많은 베스트셀러의 향연 속에서 시집을 꺼내든다는 것은 새로운 언어를 발굴하고자 하는 시인의 피나는 노력을 수면 위로 올리고, 이미 빛바래 사라져 가는 옛날의 가치들을 다시금 꺼내고, 쓸모없음을 자처하는 언어의 효용을 찾는 중요한 일이니까.
시가 필요한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지만, 스스로조차 체감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자리가 점점 사라져 가는 지금이야말로 시의 필요성을 증명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순간과 언어 사이에서 씨름하는 시인들의 노력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