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콘크리트에 담긴 새 시대의 미학
1. 브루탈리즘(Brutalism)과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2. 가난한 예술가와 부유한 탐미주의자
3. 결국 아름다움이란,
브루탈리즘(Brutalism)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흐름으로,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된 거대한 건축물을 중심으로 한다. 주로 육면체나 사면체 등의 기하학적인 모양이 반복되는 형태를 지니거나, 하나의 덩어리 같은 공간을 분절하지 않고 거대한 부피감을 그대로 살리기도 한다. 따라서 콘크리트의 골조만 남은 것처럼 보이거나, 아직 완공되지 않은 것 같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모더니즘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건축 사조이기에, 모더니즘 건축의 산실과도 같았던 독일 데사우(Dessau) 바우하우스(Bauhaus)와도 관련이 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의 주인공 라즐로 토스 역시 바우하우스에서 수학했음이 드러나는데, 나치의 규체로 인해 작업을 하지 못하고 미국에서 석탄을 캐는 일을 하던 중 백만장자 해리슨 밴 뷰런의 눈에 들어 커뮤니티 센터를 짓는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된다.
라즐로는 헝가리의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를 모티프로 하는 인물이다. 마르셀 브로이어는 바우하우스 1기 출신으로, 캔틸레버 체어(Cantilever chair)의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세스카 체어(Cesca chair)와 강철로 뼈대를 잡아 대량 생산에 미학적 발전을 도입한 바실리 체어(Wassily chair)를 만들어냈다. 영화에서 라즐로가 만든 의자-서랍 일체형 테이블과 셰즈 롱(chaise longue) 역시 마르셀 브로이어의 가구를 본떠 디자인된 것이다. 그의 가구는 바우하우스가 추구했던 미학 그 자체라고 보아도 될 정도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며, 특히 세스카 체어와 바실리 체어의 디자인은 오늘날 거의 오픈 소스화 되어 전 세계에 유통될 만큼 지속적으로 사랑받아 왔다.
가구뿐만 아니라 그의 브루탈리즘 작업물, 특히 영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St John's Abbey 교회는 현재에도 가장 모던한 건축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영화에서 라즐로가 수용소의 방을 본떠 예배당 건물을 디자인한 것은 실제 마르셀 브로이어의 작업과는 다른 허구의 사실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마르셀 브로이어는 라즐로처럼 나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거나 헤로인 중독으로 불행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이미 건축계에서는 <브루탈리스트>에 대한 신랄한 혹평이 쏟아진 바 있다. 역시 브루탈리즘에 대한 재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진 시점을 고증하지 못하였다는 의견과, 주인공 라즐로의 성격과 삶을 연출한 방식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이 대다수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라즐로를 '전쟁의 상흔에 고통받는 고독한 예술가'의 전형으로 그려낸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가디언 지에서는 'There is nothing more irritating to enthusiasts than when the mainstream tries to portray their niche world and gets it wrong.(주류가 비주류의 세계를 묘사하려다가 잘못 이해하는 것만큼 거슬리는 일은 없다.)'라는 다소 마음 아픈 문장으로 <브루탈리스트>의 연출 방식을 비판했다(Oliver Wainwright, 2025).
영화에서 그려진 라즐로의 삶이 마르셀 브로이어의 실제 삶을 곡해하다시피 재구성된 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라즐로가 허구의 인물이라 해도 실존 인물을 모티프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라즐로가 만든 가구, 건축물, 그리고 그의 배경까지 마르셀 브로이어의 그것과 상당히 닮아 있기에 이를 보는 관객 또한 자연스럽게 그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의 인물 설정이 서사의 극적인 전개를 위해 필요한 개연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뒤이어 살펴볼 라즐로와 해리슨의 관계도 이러한 개연성에 의한 것 중 하나에 해당한다.
나치와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라즐로에게서 앗아간 기회가 해리슨의 자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펼쳐지는 모습은 유리 위를 걷는 듯 불안정하다. 관객은 라즐로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에 감탄하면서도 해리슨과 그 일가의 태도가 언제 돌변할지 몰라 숨죽이게 된다. 급박한 사건 전개나 대단한 서사적 장치는 없지만, 라즐로와 해리슨의 관계 그 자체로 영화 전체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해리슨은 라즐로의 재능을 사랑한 만큼 시기했다. 부호로서 라즐로의 재능을 후원하고자 하지만, 라즐로는 마냥 안쓰럽거나 불행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다. 그 말인즉슨 해리슨이 마음 편히 동정과 연민에만 몰두할 수 없을 것이며, 라즐로와 대면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어딘가 석연치 않은 감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위화감은 해리슨의 탐미주의적 성향을 정확히 겨냥하는, 라즐로의 천재적인 감각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 테다. 이는 결국 동경과 질투, 경외와 멸시, 신뢰와 불신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으로 이어진다.
해리슨의 이 모순적인 감정은 카라라(Carrara)로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 떠났을 때 절정에 달한다. 라즐로가 예배당의 제단에 쓰일 대리석은 꼭 이곳의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바대로, 물에 젖은 대리석은 아름다운 청회빛의 자태를 드러낸다. 해리슨 역시 대리석에 뺨을 대며 감격하지만, 그날 밤 술에 취해 괴로워하는 라즐로를 겁탈하며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냐'라고 분노하는 모습을 보인다. 해리슨이 라즐로를 마구 착취하는 이 장면에서는 오히려 그가 깊숙이 숨겨두고 있었던 열등감이 비치는 듯했다.
탐미주의자의 최후는 수용소를 닮은 방을 지닌 예배당이었다. '여기 무언가 있다'는 인부의 외침은 관객에게 조용한 상상을 촉발시킨다. 그것이 해리슨이라는 암시는 그 어디에서도 드러나지 않지만, 관객은 그저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해리슨이 라즐로의 디자인에 쏟았던 애증을 떠올리면 자연히 그의 마지막은 그곳을 향했을 것이라는 추론에 도달했을 것이기에.
햇빛이 만들어낸 십자가 모양의 빛무리가 거꾸로 뒤집히는 화면 전환도 이에 신빙성을 부여한다. <브루탈리스트>에서는 유독 수직 수평의 기준을 벗어난 다양한 구도의 화면 연출이 돋보이는데, 기존의 질서에 편입되려 하지 않았던 브루탈리즘의 정신을 보여줌과 동시에 결코 평탄하고 반듯하지 않았던 라즐로의 삶 전체를 함축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미국에서 상류층 백인으로 태어나, 라즐로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삶을 망쳐 놓았던 전쟁으로 오히려 부를 더욱 축적했던 해리슨의 마지막을 은유하는 장치가 거꾸로 뒤집힌 십자가라는 사실은 꽤 흥미롭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다양한 사설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브루탈리스트>는 아름다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라즐로와 해리슨의 관계성에 주목하며 영화를 감상하다가도 언뜻 스쳐 지나가는 가구와 건물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화면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아름다웠고 더없이 흥미로웠다.
특히 라즐로가 해리슨의 서재를 완공한 후 텅 빈 공간의 한가운데 — 천장의 유리 돔을 햇빛이 원형으로 투과하는 바로 그 자리 — 에 책 거치대가 달린 셰즈 롱을 가져다 놓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비로소 모든 것이 완벽해진 듯한 기분을 느끼게끔 한다. 마치 하얀 밀크셰이크 위에 통조림 체리를 얹는 순간과 같은 완결성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프로덕션 디자이너 주디 베커(Judy Becker)가 디자인한 이 의자는 그야말로 완벽한 쇼 스토퍼였고, '과연 저것으로 서재가 완성된 것인가?'라는 관객의 의심에 마침표를 찍는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 장면은 라즐로가 해리슨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본인의 효용을 증명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라즐로의 작업물 — 가령 해리 밴 뷰런의 사무실 — 은 또 어떠한가. USM Haller 모듈식 수납장, PK61 테이블, MR 셰즈 롱까지 완벽한 미드 센추리 모던 스타일로 꾸며진 사무실의 모습은 저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고증 오류나 왜곡 등으로 비판받기도 했지만, <브루탈리스트>는 건축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 일반 관객들이 3시간 35분 동안 미드 센추리 모던의 가구와 콘크리트의 미학에 푹 빠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그 소임을 다했다고 보고 싶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시대를 불문하고 기존의 미학을 갱신하고자 하는 시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