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보고 실제로 딸을 데려오기까지는 열흘 가량이 소요되었다. 그 사이 우리는 아기 침대를 사고, 젖병을 사고, 또 뭘 사고, 뭘 샀다. 아기에게 필요한 물건은 끝이 없어 보였다. 모든 물건엔 ‘신생아용’이 존재했다. 신생아용 목욕 용품과 세제와 작은 목욕통, 작은 면봉과 손톱깎이까지. 아이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앙증맞았다. 유모차와 카시트까지 마련하고 나니, 그 길던 기다림의 시간이 다 끝났다.
우리는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듯이 경건하게 그날을 맞았다. 경건하게 목욕을 했다. 차분히 준비물들을 다시 점검했다. 집을 나서기 전 집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우리는 둘이 이 집을 나가 셋이 되어 돌아올 예정이었다. 입양 카페의 조언에 따라 아기가 집에 온 첫날에는 다른 가족들은 아무도 오지 않기로 했다. 안 그래도 낯선 환경인데 많은 사람이 와 북적이는 것은 아이에게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성대하고 그럴싸한 환영파티는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축하 속에 아이를 맞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이를 위해 부부만의 조용한 환영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우리는 늘 그랬듯 센터 앞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약속 시간까지 기다렸다. 남편은 카시트가 제대로 설치된 것은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갑자기 연애시절부터 타던 차가 너무 구식 같아 잠시 마음이 쓰였다. 평소 고급 세단을 타고 싶은 마음이 크진 않았다. 단지 위탁어머니가 아이를 배웅하러 우리 차에 함께 오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 차를 보고 부자가 아니라서 아쉬워하시진 않으시겠지? 좀 더 좋은 차를 몰았으면 좋았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럴 리 없지만 외제차라도 몰고 왔다면 든든해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아쉬움 같은 게 있었다. 평소 차에 대해 불만이 없었는데 이날만큼은 잘 보이고 싶단 마음이 컸던 기억이 난다. 잘 키울 수 있다는 우리의 마음을 드러낼만한 게 겨우 표정과 말 뿐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땐 그랬다.
이 날의 절차는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나는 위탁 어머님과 복지사님께 부탁을 드려 아기를 안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딸에게 친생모의 사진을 구해줄 순 없겠지만, 나중에라도 이 사진이 자신의 시작을 궁금해할 딸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진을 남겼다. 딸을 안고 복지사님께 몇 가지 전달 사항을 듣는 사이에 위탁어머니는 짧게 목인사를 하시더니 바로 자리를 뜨셨다. 가만히 내게 잘 안겨있던 딸이 위탁 어머님이 방문을 나서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위탁 어머니가 계단을 다다닥 내려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나는 아기를 살랑살랑 흔들면서도, 울음을 빨리 멈추게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울음이 계단을 내려가는 위탁 어머님에게 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감사 표시일 터였다. 이 정도는 울어줘야 조금 덜 섭섭하시지 않을까. 위탁어머니는 또 다른 아이를 기르시겠지만, 그래서 어쩌면 언젠가는 내딸을 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딸과 위탁어머니가 함께 했던 그 순간은 분명히 존재했으니까. 이제껏 내딸은 위탁어머니를 엄마로 알고 살았을테니까. 이 역시 너무 소중한 딸의 시간이었다.
복지사님께 인사를 드리고 딸을 안고 센터를 내려오는 계단이 얼마나 가파르게만 느껴졌던지. 남편이 앞장서면서 무슨 험한 산이라도 내려오듯, ‘조심조심’을 입으로 외웠다. 아이를 카시트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뒷자리에 앉아서 카시트에서 새근새근 잠든 아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입을 오물대면서 자는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다들 산후조리원에서 집에 아기를 데리고 올 때의 심정이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마 정말 갓난아기라 더 조심스럽겠지만, 우리도 아기가 매우 낯설었기에 조심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아파트에 도착해 안아서 엘리베이터를 태우고도 잠이 깨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잠시 후에 깨서도 내 품에 안겨 멀뚱멀뚱 이곳저곳을 쳐다보기만 했었다. 지금은 말괄량이지만 그때만 해도 정말 순하고 무던한 아이였다. 그제야 우린 드디어 셋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남편의 휴대전화로 첫 가족사진을 찍었다.
‘내 딸, 드디어 집에 온 걸 환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