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후기로 들어서면서 시간은 더욱 더디게 흘렀다. 마치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데,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흐릿하게 나온 흑백의 초음파 사진을 바라보는 것뿐인 기분이었다. 태동이 워낙 심한 덕에 화창이가 살아있음을 수시 때때로 느끼지만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직접 볼 수도 없는 상황. 나에게 남은 두 달은 그렇게 서서히 흘러갔다. 여기에 내 삶의 속도를 더더욱 늦추는데 기여한 것이 것은 전 세계를 집어삼킨 코로나19였다.
선배 엄마들로부터 출산 전에 최대한 많이 놀러 다니고, 영화도 보고, 고기 굽는 식당도 많이 가둬야 아기 낳고 후회가 없다는 조언을 주야장천 들어왔다. 이전에는 나의 선택으로 외출을 결정했지만, 코로나19는 나의 모든 선택권을 앗아가 버렸고, 장을 보고, 외식을 하고,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는 일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로 변질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지역별로 가볼 만한 곳이나 맛집,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는 고스란히 삭제했고, 직장도 다니지 않던 나는 오로지 집에만 머물게 되었다.
코로나19는 우리 모두에게 평범한 생활의 행복을 깨닫게 했다. 산부인과 정기검진이라도 있는 날이면 마치 지뢰 찾기 게임을 하듯, 내가 간 병원에 확진자가 방문하지 않았기를 기원하며 마스크와 손소독제를 챙겼다. 내가 사는 지역에도 확진자가 30명대를 돌파하자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을 경멸하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하루가 반복됐다. 정부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라 권고했지만, 당시의 마스크는 사고 싶다고 살 수 있는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었고, 마트는 마스크가 없어 오픈 시간까지 몇 시간이고 줄을 선 사람들을 돌려보내기 일수였다. 인터넷이나 홈쇼핑으로 구입하려면 왕년에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에 소질이 있던 사람이 아니고서야 구할 수 없는 귀중품이 되었다.
서로의 건강을 묻는 안부는 인사치레가 아닌 깊은 진심이 되었고, 약국에서 마스크를 사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야 했기에 마스크를 선물하는 일은 서로의 신뢰와 애정을 느끼는 수단이 되었다. 나를 아껴주시던 은사님께서 택배로 마스크 다섯 개를 보내주셨는데, 임산부가 줄을 서서 마스크를 구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고이 모은, 심지어 제조사도 다른 다섯 개의 마스크는
어떤 선물에도 비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비교적 마스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요즘까지도 나는 그 마스크 다섯 개를 사용하지 않고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그러던 중 시간은 흘러 만삭이 된 나는 외출이 무서워 꼼짝없이 집에서만 지내다 답답한 마음에 동네 산책을 감행했다. 현관을 나서려는 순간
'아차, 마스크!"'
하고 돌아섰는데
쿵-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양쪽 발목을 포갠 채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시선이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순간적으로 내 두 손은 만삭의 배를 움켜잡았고,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장 먼저 현관바닥을 확인했다.
'혹시 양수가 터졌을까?'
다행히 바닥은 깨끗했고, 잠시 뒤 기어서 거실에 누워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나 넘어졌어. 양수는 터지지 않았는데 걸을 수가 없네."
회사에서 부리나케 달려온 남편과 산부인과에 도착해 9개월 동안 기다린 시간 중 가장 애타고 긴장되는 순간을 보냈다.
"다행히 아기는 무사하네요."
그제야 긴장했던 몸에 힘이 빠지면서 양쪽 발목이 시큰거렸고, 정형외과에서 발목 인대가 파열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태어나 양쪽 다리에 깁스를 한 적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임산부의 몸으로. 9개월까지 잘 버티다 막달에 양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휠체어를 탄 임산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