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미 Sep 23. 2023

뒤돌았을 때 선택받은 나의 20대

꼭 쓴 맛을 봐야지만 주어졌던 달콤함(?)




“대학 생활을 하며 방송 경력은 제가 채우려고요. “



이렇게 패기 있게 면접에서 외치던 나는 21살 방송의 문을 처음 두드리며 그 경력 한 줄 채우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다. 특히 그 시작과 처음이.




한 번 방송 경력을 채우기 시작하면 그 이후로는 그 경력을 동아줄 삼아 서류던 면접이던 잘 붙는데 그 처음을 시작하기가 매우 어렵다. 방송사를 이해는 한다. 출연하는 사람은 녹화나 생방 모두 카메라, 조명, 연출, 헤어와 메이크업 이 모든 분들의 노력을 시청자와 제일 가까이서 전해야 하는 역할이니까. 쌩(?) 신입보다는 중고 신입이 조금의 실수라도 할 확률이 줄어드니까.












나 때는 아카데미를 다니면 거기서 추천받아서 진출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업체가 아카데미에 특채 의뢰를 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20살 대학교 1학년은 신나게 놀고), 21살의 나이에 쇼호스트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다행히 학교에서 걸어갈 수 있는 곳에 분원이 있어서 학원 수업시간표에 맞춰 대학교 수업 스케줄을 짰다.(?)






평균 10살 많은 언니 오빠들이 대다수인 학원에서 어린 나이에 열심히 해서인지 당시 금요일이면 전 국민이 보던! VJ 특공대에 원장님 추천으로 ‘쇼호스트 지망생’으로 나가기도 했다. (강남역 한복판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줄넘기와 훌라후프를 하고, 학원 피티에서는 된장이랑 고추장을 얼굴에 발랐던….) 하지만 그 이후 그렇다 할 경력 없이 지원서만 수십, 수백 장을 썼다.






키가 특출 나게 큰 것도 그렇다고 외모가 빼어나게 예쁜 것도, 학벌이 엄청나게 좋은 것도 아닌 인서울 대학교 2학년 생을 뽑아줄 곳이 없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느꼈다. 이 시간을 내 성장의 시간으로 채우겠다 다짐하고 매일 발성과 발음 연습, 그리고 자기소개서 쓰기에 몰두했다. 하나 꽂히기까지는 어렵지만 그 한 길을 정하면 묵묵하고 우직하게 해 나가는 나의 장점이 언젠가는 빛을 발할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실은 3년이 가기 전에 나에게 다가왔다.




모 스포츠방송 아나운서에 지원했다. 한 주의 스포츠 관련한 소식들을 짧게 전하는 예쁜 언니들이 나오는 방송이라고 하면 다들 아실런지. 당시 스포츠 아나운서는 키가 크고(…) 날씬하고 예쁘고 등등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많았어서 ‘나는 아닐 거야’ 생각하며 지원했던 기억이 난다. 카메라 테스트와 면접은 봤지만 역시나 ‘불합격’. 좋은 경험이었다 생각하고 뒤돌아서 또 다른 지원서를 쓰려는 데 그곳에서 연락이 왔다.







“ㅇㅇㅇ에 지원하신 채미님 맞으시죠? 저는 이번에 면접 본 PD ㅁㅁㅁ라고 하는데요,”



이번에 지원한 스포츠 아나운서에는 맞지 않지만 본인이 생각하셨을 때 ‘스포츠 중계 캐스터’ 엔 내가 딱이라며… 발성과 순발력, 에너지가 좋은데 회사에서 여성 중계 캐스터를 키워보려고 하니 혹시 생각 있으면 함께 하자는 전화가 왔다. 순간적으로 축구가 11 명인건 아는데 골키퍼 포함해서 11명인가 빼고 11명인가… 이 정도로 축구지식이 없던 나인데 내 가능성을 보고 교육도 시켜주시고 기회도 주신다니 넙죽 좋다며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매주 수업 마치고 일주일에 한 번, 많으면 두 번 정도 회사에 가서 영상을 보며 해설위원님 역할을 해주시는 분과 맞춰서 공부를 했다. 각종 축구의 기술 등을 프린트해서 이론으로 익힌 뒤 그게 실제 경기에서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지를 눈으로 보고 입으로 내뱉었다. 당시 방송 외에도 대학생 홍보 대사란 이름으로 화장품, 의류, 주류, IT 관련 회사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학교 수업을 들으며 외부 활동을 여러 개 하는 것이 벅차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과외알바도 하며 동아리를 창립했…)





그래서인지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첫 중계가 결정됐을 때 더 긴장되고 떨렸다. 다른 일을 한다는 핑계로 준비를 완벽하게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원래는 내셔널리그 축구 중계를 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그전에 경험을 쌓기 위해 초중고 리그 먼저 나가보는 게 좋다고 하시며 내 첫 중계는 초중고 리그 경기에 배정되었다.








비가 많이 오던 주말 아침. 천안 가는 기차에 덜덜 떨며 탔던 나는, 그동안 방송이 하고 싶었던 마음과 달리 아이러니하게 ‘비가 더 많이 와서 경기가 취소되면 좋겠다.’ 마음속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이 내 바람도 모른 채 천안에 도착하니 무지개가 반짝 떴고, 신기하게 내 마음도 방긋 떠올랐다.



비가 와서 반짝반짝한 잔디밭 위 아이들이 공을 차며 몸 푸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게 두려움으로 쿵쾅거리던 심장이 설렘으로 콩닥이기 시작했다. 저 하늘에 무지개가 첫 중계가 무사히 잘 마칠 거라며 날 다독여 주는 것 같았다.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두 경기 연속 중계를 마쳤다. 처음인데 떨지 않고 잘했다는 칭찬이 마치 저 어린 축구선수들과 함께 나도 쑥쑥 자랄 거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자그마치 2012년 페이스북이라뇨…..












신기하게 첫 출장을 마치고 방송의 재미를 즐기고 싶다 생각했을 때 시험 봤다 떨어진 방송국에서 또(!) 연락이 왔다.  


중계 캐스터 공부를 하면서도 꾸준히 리포터나 아나운서에 지원을 했는데 그중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겉으로는 추가합격(?) 이라지만 알고 보니 내가 떨어졌을 때 뽑힌 세 명 중에 두 명이 바로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해서 인원 충원이 필요한 상태. 역시 방송 업계는 한 번 경력을 트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구나 싶었고, 이 방송국에서 일을 시작하면 나도 또 좋은 기회가 바로 생길 것 같았다. 그래서 또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이번엔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기존에 뽑아서 교육받은 사람이 둘이나 나가버렸고, 프리랜서인 이 회사에서 돈도 안 받고 교육을 또 시켜줘야 하는 선배님들의 불평불만도 매서웠다. (어떻게 보면 밥그릇 뺏으러 온 사람은 나니까…) 사실 내가 일했던 곳은 교통과 기상을 모두 다뤄야 하는 곳인데, 기상은 어찌어찌 혼자 해본다 쳐도 교통은 배울 게 참 많았다. 대본도 내가 짜야하고, CG를 넘겨주는 것도 직접 내가 다 했다. 심지어 생방송으로 이루어지는데 카메라를 직접 조작하며 말을 해야 했고, 막히는 곳은 손수 터치스크린에 빨간색 화살표를 그려서 눈에 더 잘 띄게 보여주기도 했다. 이 모든 게 프롬프터 없이(!) 5분 간의 생방송을 이어가야 한다는 게 제일 큰 어려움이었다.






게다가 평일은 수업을 들어야 하는 대학생이기에 주말 방송을 맡았더니, 평일에 비해 이야기할 거리가 많았다. 순식간에 도로에 사고가 이렇게 잘 나는지 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분명 1분 전 까지는 원활했는데 생방송 중에 카메라를 열어보니 꽉 막힌 상태…(아직도 아찔하다…) 파란색 화살표를 그리려고 색상을 골랐는데, 지나가기에 수월하다며 말을 내뱉으려 보니 차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모습을 봤을 때 그 암담함… 몇 번의 방송을 하며 능구렁이처럼 지나가는 방법을 익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기기들을 조작하며, 외운 대본을 기억하며 말하고, 카메라에 보이는 것까지 신경 써야 하고, 동선도 꽤 길고 복잡했기에 얼렁뚱땅 엉망진창인 방송을 몇 번 했다. (화면이 전환되어 카메라 원샷을 받았는데 큐카드를 거꾸로 집었다가 PD 님의 소리지름에 오렌지주스를 뱉어버리는 짤처럼… 스르륵 큐카드를 바닥에 버린 적도 있다. 환장…)  










지금도 장롱면허 15년 차인데 이 때는 더더욱 운전을 못할 때라 강변북로가 뭔지도 올림픽도로가 뭔지도 잘 몰랐던 경기도민. 그래도 마냥 행복하고 즐거웠다. 가정에서는 많이 보는 채널이 아니라지만, 지하철 역 TV에 항상 틀어놓는 게 좋아서 나름 자부심도 있었다. 이때 같이 뽑힌 동기 언니들과는 아직도 같이 만나는데 만날 때마다 ‘채미는 집에 가서 우는 줄 알았어… 하도 선배가 막말(?)을 하는데도 표정이 멀쩡하길래 얘는 혼자 우나? 싶었거든’이라고 말하곤 한다. 솔직히 진짜 하나도 안 슬프고 울지도 않았다. 오히려 재밌었다. 눈치가 없었던 건지 아님 긍정적인 건지.








직접 그림을 그렸던 모니터, 다음 화면을 보여주는 모니터, 카메라까지. 앞을 보지만 옆도 티 안나게 봐야하는 생방송의 묘미(!)




다들 못한다고 뭐라 해도 나는 경험이 없으니까 못하는 게 당연해. 하다 보면 잘하겠지!




이렇게 돈도 주면서(?) 메이크업이랑 헤어도 해주는 꿀직장이 어딨냐며 매주 주말의 명동 출근을 즐겼다. 이번 주는 어떤 간식을 사서 중간에 쉬는 시간에 먹을까. 오늘은 메이크업 선생님이랑 무슨 얘기를 할까. 비록 처음에 뽑히진 않았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고 그래서 더 행복했다. 사실 이 때도 계속 쇼호스트 지원을 했는데, 서류부터 떨어지던 내가 모 홈쇼핑 카메라 테스트에 임원면접까지 보던 시기라 나도 이제 이 방송국을 거쳐 다른 곳으로 이직할 수 있겠구나! 하는 김칫국을 마셨던 것 같다.







지금 다시보니 너무 나이들게 스타일링 했던 25살의 나.








하지만 역시나. 20대의 나는 한 번에 얻어지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그 홈쇼핑 마지막 면접에서는 굴욕감도 느꼈다. 수십 번의 면접을 보고 웬만한 건 다 받아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면접에서 울어버렸다. 밝고 자신감 넘쳤던 내가 그 한 번 면접에서 무너져버렸다. 아직 넌 어린 나이니까 또 도전하면 된다는 그 말이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상처가 깊어지게 됐다. 꽤 오랜 시간을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남들에겐 난 어린 25살, 첫 카메라테스트와 면접에서 떨어졌기에 아직 기회가 더 많은 아인데 왜 이렇게 빨리 되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꿈꿔온 일이기에 좌절감이 더 컸다. 그땐 어렸으니 이런 마음을 추스르는 법도 잘 몰랐다. 아무튼 그렇게 또 쓴맛을 봤다.






벌려놓은 대학생 대외 활동이 많았고 학교에서 동아리를 하나 만들었더니 정말 눈코뜰 새 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 과외 알바는 그만뒀지만 뭐라도 베풀고 나누고 싶어서 새터민과 한부모 가정 친구들을 위한 공부방 선생님으로 봉사를 했다. 허한 마음이 조금씩 채워졌고, 대학교 마지막 학기를 공부나 하며 졸업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오던 교통, 기상 캐스터일은 계속했지만 예전만큼 재밌지 않았고 내가 진짜로 원하는 홈쇼핑 일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간단하게 적어보려 했는데 예전을 생각하며 적다 보니 생각 나는 에피소드가 많아 구구절절 또 길어졌네요. 홈쇼핑 진입도 물론(?) 한 번에 되지 않았어요. 25살에 홈쇼핑 방송을 하는 첫 회사에 취업이 되었는데 그 이야기도 이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기버 Giver를 꿈꿨던 18살의 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