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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nien Apr 19. 2018

나의 맥북, 사파리 읽기 목록

과거를 회상하는 방법 

이상하게 나는 맥북, 사파리 읽기 항목을 훑어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동안 내가 가졌던 관심사들을 하나씩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그런 것 같다. 독일에서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요리에 부쩍 관심이 생겼다. 독일에 사는 한국인들의 블로그를 찾아 들어가 그들이 장본 것, 그리고 요리한 사진들을 보면서 나도 이렇게 잘 해 먹고살아야지 하며 읽기 목록에 저장해두었다. 어느샌가 수업이 끝나면 마트에 들려 장을 보고 그럴듯한 요리를 만들어 먹는 것이 하루의 낙이 되어버렸다. 정성스럽게 사진 찍고 꾸준히 글을 올리는 성격이 되지 못해 블로그를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어디 가서 요리 몇 개정도는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수준은 됐다. 


유학 시절 나는 인생 최대의 슬럼프를 겪은 적이 있다. 2학기 때 과에서 베를린으로 답사 가기 전이었는데 그것은 '혼동' 그 자체였다. 하고 싶은 것과 지금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나는 상당히 혼란스럽고 괴로웠었다. 하고 싶은 것은 잡지를 만드는 일이었고 해야 하는 것은 지금 하고 있는 공부였다. 혼자 끙끙 앓다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충동적으로 일본행 비행기표를 구매해버렸다. 그래서 나의 사파리 읽기 항목엔 일본행 최저가 사이트들이 저장되어 있다. 왜 하필 일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유럽 생활이 지겨웠고, 한국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는 나에게 일본이라는 나라가 한국과 가까워서 만만했던 것 같다. 물론 이 계획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베를린 답사 비용을 이미 지불했고 우리 코스 디렉터와 더 이상 트러블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꾸역꾸역 짐을 챙겨 베를린으로 향했고 열흘 동안 보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마지막 날 밤, 친구와 맥주를 마시며 나는 인생의 암흑기를 겪고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가만히 나의 얘기를 듣던 친구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선택을 하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다만 나는 지금 불안하고 충동적이고 우울하니, 마음이 조금 더 건강 해질 때 그때 가서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어떻게 보면, 그 친구 덕분에 무사히 학업을 끝낼 수 있었다. 물론 완전히 끝낸 건 아니지만.. 그 후론 시험과 프로젝트에 집중하면서 잡지에 대한 생각은 잠시 덮어두었다.


전쟁 같았던 마지막 프로젝트가 끝나고 잔잔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슈투트가르트로 선배가 놀러 온 적이 있다. 학부시절 함께 공모전을 하며 한 때는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던 선배이다. 그는 졸업하고 다른 분야에서 일을 시작하였고 몇 년간 열심히 모아둔 돈으로 회사를 관두고 배낭여행 중 나를 찾아왔다. 빡빡한 여행 일정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매일이 새롭고 설렐 선배는 내게 말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내가 하고 싶은 걸 시작할 거야. 물론 처음은 힘들고 어렵겠지만, 그동안 나는 할 만큼 했고 이제 내가 하고 싶은걸 하며 해야지.” 무심한 듯, 덤덤하게 말한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우린 시끄럽고 캄캄한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눈빛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선배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있을까? 나에게도 그 기회는 있는 걸까? 순간 복합적인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와 심장이 일렁거렸다. 하지 못했었던 아쉬움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한 달이라는 기간을 두고 나는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논문을 쓰기 전, 인턴을 할 것인지 한국에 돌아가 잡지를 시작할 것인지. 


한 달 동안 미친 듯이 인턴을 지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었던 것 같다. 인턴 공고가 올라온 사이트들을 닥치는 대로 저장해 두고 지원했다. 결과는 처참히 다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샀다. 그 후로 한국에 돌아와 지금까지 약 10개월간 잡지 만드는 일에 빠져 살았다.  


지금 나의 사파리 읽기 항목을 보면 수십 개의 사이트가 저장되어있다. 이제 들어갈 일 도 없는 사이트들이 반 넘게 차지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선뜻 지울 수가 없다. 그건 아마도 그때 그 순간에 가졌던 나의 절실함과 절박함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다시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 남은 논문을 마쳐야 한다. 곧 나의 읽기 항목은 논문과 관련된 사이트들로 다시 가득 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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