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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냥 Mar 10. 2024

20대 D 이야기, 첫 번째

20살이 되고서 많은 일이 있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은

당시 우리보다 6살 이상 많았던 남자에게 빠져

정신 못 차리는 모습에 본인이 내게 자신을 말려달라고 하여 말려줬더니 결국은 서로 절교를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여행도 겨우 다녀온 주제에 대학을 갈 돈도 없었고 그럴 성적도 안 됐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은 지원해 주는 제도가 있었음에도 올바른 판단을 못했다.


고등학교에 가서 친구가 생기고 밝아졌다 한들

내 가정사와 형편은 더욱 나빠질 뿐이었으니까,


어떤 직업이든 돈을 버는 직업을 가진 보통의 부모님들이 자녀에게 해주는 평범하고 보편적인 사회의 시선에 대한 조언이 필요했지만, 그랬다면 조금 더 수월한 인생이었겠지만.


이 망가지고 무너진 집안에서 사회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고, 결국 대학은 가지 않았다.


이 선택으로 인해 고졸이라는 낙인이자 허들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와 콤플렉스로 남게 될 줄 몰랐다.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회사 정규직이 되어보고 싶다는 마음에

어떤 도급사 고객센터를 들어가게 되었다.


몇 년을 다니다가 일이 터졌다.

당시에는 독립하다 본가에 들어와서 살았었는데


어느 날 할아버지가 너무 안쓰럽게 느껴졌다.

식사를 드셨는데도 배고프다 하셔서 밥을 차려드렸는데

마치 초점이 잡히지 않는 것 마냥 직접 드시질 못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대신 떠먹여 드렸는데

표정이 마비되며 말도 점점 어눌해지시더니

결국 응급실을 가게 되었고 그날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 증상이 뇌졸중 증상이란 걸 미리 숙지하고 있었다면

한가하게 식사를 떠먹여 드릴게 아니라 골든타임 내에 병원으로 데려다 드렸을 텐데.

그랬다면 다른 결과가 있었을까.


중환자실에서 한 참을 계시다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신 채로

효도는커녕 수 없이 자식과 손녀(동생)에게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겪으시고도 이 기생충들을 막노동으로 먹여 살리며 마지막까지 폐지를 주워 한 푼이라도 벌려고 고생만 하시다가 떠나셨다.


그 와중에도 휴가 같은 개념이 없는 일개 상담사인

나는 일이 끝난 뒤에야 중환자실 병문안을 할 수 있었다.

일을 그만두고 계속 옆에 있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놈의 돈 돈 돈 때문에.


20년을 조금 넘게 살며 처음 맞은 죽음인 데다

부모님 ‘대신’이 아니라 부모님이었던 분이 돌아가시니

그날을 기점으로 내 안에서 무언가 부서져 사라지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아버지라는 인간은 제대로 된 영정사진 한 장 없는 할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날까지도 술을 처먹고 아주 대단하게 장례상을 발로 차며 고인 모욕을 일삼았다. 마지막까지 참 비참한 인생을 보내시는구나. 자식이 뭐길래.


그 후 나는 몇십 년이 지나도 그 기생충 인간말종과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한 번은 제삿날 큰 집에 나타나 마주쳤는데 바로 밖으로 나와버렸다.


본인 아버지 장례식도 발로 차며 망쳐놓은 인간이

제사는 왜 오는 걸까?

밥 한 끼 얻어먹으려고 오는 꼴로밖엔 이해가 안 된다.


아무튼 나는 버스에서 할아버지와 닮은 것 같은 사람만 봐도 자동반사로 눈물을 흘리며 한 3년 간은 매일 밤 오열하는 날로 보냈었다.


더하여 그간 치매 걸린 할머니를 옆에서 케어해 주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거짓말처럼 할머니 또한 급격하게 치매 증상이 나빠졌다.


저렴하기에 멀고 먼 요양병원을 찾아 입원을 하고

직장 때문에 주에 한 번씩만 찾아뵈었는데

그곳에 두고 나오는 심정은 말로 표현이 안된다.


늙고 병들었단 이유로 그곳에서 방치 아닌 방치되어 계신 분들을 보니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도 할아버지를 따라 먼 길을 떠나셨다.


나는 살 이유를 찾기 위해 정신과를 처음으로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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