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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적의 경로

인생도 최적화가 필요합니다, 마치 모든 마케팅의 첫 단계처럼

by 쪼의 세상

"내가 걸어온 구불구불한 길이 나에게는 최적의 경로였다"


- 한국인 최초 필즈상 수상자 허준이 -




저는 광고 마케팅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그리고 틱톡과 같은 매체가 발달하면서 광고는 복잡해졌습니다. 요즘, 광고의 핵심은 타겟팅이죠. 브랜드가 만든 광고에 가장 크게 반응할 사람들을 찾아서 머신러닝을 돌립니다. 알고리즘은 예산에 따라 최고 효율의 광고 집행을 돕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최적화'라고 하죠. 요즘 광고 시장에는 그다지도 새롭지 않을 만큼 정석처럼 자리 잡은 과정입니다. 주로, 데이터 마케팅 혹은 퍼포먼스 마케팅에서 주로 쓰는 말입니다. 비록 브랜딩과 카피라이팅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저 역시 최근에는 열심히 배우고 있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한국인 최초 필즈상 수상자인 허준이 교수의 입에서 자신이 걸어온 구불구불한 길이 자신에게는 최적의 경로였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머신러닝이 자리잡은 디지털 광고의 세계는 대부분 수학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최적의 타겟을 찾아내기 때문이죠. 저에게 오히려 한눈에 들어온 말은 '구불구불'이었습니다. 세계의 석학들이 머리를 맞대어도 풀지 못했던 수학 난제를 풀었던 허준이 교수가 꺼낸 말이 '구불구불'이라니. 컴퓨터처럼 효율적인 계산을 좋아할 법한 딱딱한 수학자의 입에서 가장 빠른 길이 아닌 구불구불한 길이 최적의 경로라고 이야기해줬기 때문이죠. 그의 말을 듣자마자, 제 커리어를 반추해보게 되었습니다. 저의 커리어나 인생을 마치 퍼포먼스 마케터처럼 늘 가장 빠르게 최적화하고 있지는 않았나 싶더라고요.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요.


"세계의 난제를 풀 때도, 인생의 난제를 풀 때도 한번에 풀릴리가 없잖아?"

그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수학에서 가장 중요한 게 시행착오라고 하죠. 그런데, 어릴 때부터 우리는 수학을 암기하거나, 틀리기가 겁났습니다. 빠른 시간 안에 문제를 풀어내고, 점수를 올리는 것만이 수학을 대하는 태도였죠. 여러분 모두 학습지 선생님이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 쓴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는 꽤 많습니다. 심지어는 자는 척도 해봤어요. 물론, 선생님은 다 알아차리셨고 숙제를 못한 저는 혼났지만요. 네, 자연스럽게 '수포자'의 길은 이렇게 빨라집니다. 저의 어린 시절 수학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요즘 일타 강사로 핫한 정승제 선생님께서 듣는다면, 땅을 치고 안타까워할 일이 그때는 더 흔했습니다.


그런데, 허준이 교수의 말을 듣고 나니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 사회에서 나고 자란 우리들이 생각하는 최적화는 '남들보다 빠르게', '한 번에 잘하기', '가성비'에 맞춰져 왔잖아요. 인생의 모든 단계가 정해진 것처럼 되어 있고, 뒤처지면 큰일 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때가 되면 영어 유치원 가고, 입시를 준비하고, 원하는 대학에 가서, 남들이 선호하는 기업에 들어가고, 늦지 않게 결혼을 하고, 수도권에 집을 사고, ... 어휴, 벌써 숨이 찹니다. 이 단계는 멈춤 없이 쭉 이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최적의 경로는 하나이며, 모두가 좁은 하나의 길에 들어가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뒤처진다는 느낌을 받으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창의적인 생각과 남들과 다른 시선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케터이자 카피라이터입니다만, 보편적인 경로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칠 때마다 불안이 엄습합니다. 최근에 가장 큰 불안을 느낀 건 카피라이터를 그만두고 갑자기 브랜드 마케터가 되기로 결심할 때였습니다. 대개 카피라이터로 커리어를 시작하면 대부분 CD(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어 광고 제작 총괄을 맡게 되는 하나의 길을 꿈꾸게 됩니다. 저는 왠지 그 길이 무서웠나 봐요. 아직은 어린 마음이기도 했지만, 하나의 길로 좁혀진다는 것이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경험을 확장하고자 돌연 브랜드 마케터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웬걸, 그 이후에는 변덕을 부려 현재는 글로벌 콘텐츠 플랫폼에서 크리에이티브 컨설팅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굳이 커리어를 요약하자면, 카피라이터였다가 브랜드 마케터였다가 지금은 매체사에서 크리에이티브 담당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삐삑, 경로 이탈입니다. 빨리 정답으로 돌아가세요, 삐삑"

지금 제 마음의 소리입니다. 제 마음속에 최적의 효율로 정해놓은 길에서 이탈한 자신을 느꼈던 거죠. 쭉 한 길로 갔다면 지금쯤 안정적으로 커리어를 이어나가지 않았을까? 섣불리 직무를 옮기지 말고 선배들의 말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나를 너무 과신한 건 아닐까? 온갖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꼭 저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많은 분들이 인생의 선택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실 거라 생각해요. 진로, 연애, 점심 메뉴, 그 어떤 선택이든 책임이 따르고, 결과에 대한 후회는 뒤따라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행착오를 때때로 시간 낭비라고 부릅니다. 시간 낭비하지 않고, 최고의 효율을 내어 가장 앞서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뒤처진 스스로를 자책하곤 합니다.


그런데, 허준이 교수의 말과 함께 최근에 저에게 위로가 되었던 건 오히려 퍼포먼스 광고 시스템 내에서의 '최적화' 과정이었습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사실, 모든 광고 캠페인은 초반에 최적화된 예산 분배와 타겟을 찾기 위해서 비용을 소진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 기간 내에는 초반에 설정했던 광고 목표를 바꾸지 않습니다. 전환 광고를 켰다면 이른바 CVR은 바닥을 기고, CPM, CPA와 같은 단가 지표는 널뛰기를 합니다. 이때 금방 캠페인을 종료시킬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시행착오의 데이터가 쌓이고 나면 그제서야 광고 캠페인은 최적화된 비용 소진과 타겟을 찾게 되고 시스템은 안정을 찾게 됩니다.


"최적화는 생각보다 울퉁불퉁합니다"

제 전문 분야가 아닌 퍼포먼스 광고의 영역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최적화는 생각보다 울퉁불퉁합니다. 저는 이 과정이 인생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광고 캠페인이 초반에 설계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처럼, 인생 역시 설계한 대로 착착 흘러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수많은 오답을 거치고, 틀리면서 고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백 일을, 천 일을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비로소 나의 인생에서 최적화된 경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죠. 누군가 정해준 답이 아닌 나만의 정답을 찾는 과정입니다. <유퀴즈온더블럭>에서 유재석 님도 허준이 교수의 말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목표를 정해 놓는다고 해서 결코 그렇게 되지도 않아요, 저도 제가 이러고 있을 줄 몰랐거든요". 자타공인 국민 MC에게도 오늘날의 자신이 이 위치에 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본 리쿠르트 사의 전설적인 광고 중에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다'라는 광고가 있습니다. 카피라이팅을 공부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카피를 어떻게 쓸까 고민할 때마다 찾아본 광고입니다. 그 광고에도 이런 말이 나옵니다. "길은 하나가 아니다. 결승점은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수만큼 존재한다." 라는 카피가 있습니다. 인생은 하나의 결승점을 쫓아 경쟁하는 마라톤 게임이 아니라는 말이죠. 오히려 각자의 결승점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 말이 허준이 교수의 말처럼, 인생의 최적화에 적용되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천만 명의 사람이 있다면 천만 명의 최적의 경로가 있다는 거죠. 그리고 이 과정을 시간 낭비라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해보지 않으면 최적의 경로를 찾을 수 없습니다. 최적화는 내가 원하는 목표로 나아가는 것도 있지만, 나의 진짜 모습을 찾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허준이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나만의 최적의 경로가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출처 : 스픽


얼마 전 온에어된 AI 영어 학습 솔루션 '스픽' 서비스의 광고 캠페인의 슬로건 카피도 맥락을 함께 합니다.

"틀려라, 트일 것이다". 영어 학습에 있어서도 틀리는 걸 겁내다보니 우린 12년 이상 영어 공부를 해왔지만 자신 있게 영어 한 마디 하기 부끄러워 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기에 많이 틀려야 트이는 건데 말이죠. 저 스픽 광고 캠페인이 이 핵심을 잘 이야기해주고 있어서 인사이트가 있는 한 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틀려야 합니다. 그래야 최적의 경로를 찾을 수 있죠. 시행착오는 차근차근 우리의 발자국이 되어, 우리가 갈 길의 밑거름이 되어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소비자들의 마음을 정화히 꾀뚫고 있는 카피라이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적의 경로, 최적화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이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요. 허준이 교수가 서울대학교 졸업 연사로 나서서 후배들에게 졸업 축사로 남긴 말을 들여다보면, 그 의미를 보다 잘 알 수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각자의 길을 찾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그 구절을 잠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07년도 여름에 졸업한 수학자 허준이입니다.


우리가 팔십 년을 건강하게 산다고 가정하면 약 삼만 일을 사는 셈인데,

우리 직관이 다루기엔 제법 큰 수입니다. 저는 대략 그 절반을 지나 보냈고,

여러분 대부분은 약 삼분의 일을 지나 보냈습니다.

혹시 그중 며칠을 기억하고 있는지 세어 본 적 있으신가요?

쉼 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우리가 오랫동안 잡고 있을 날들은 삼만의 아주 일부입니다.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주고 있습니다.

(중략)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중략)

오늘같이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하니 들뜬 마음에 모든 시도가 소중해 보입니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퍼포먼스 광고 캠페인의 1~2주의 최적화 기준은 우리가 직관할 수 있을 범위 안의 숫자입니다. 그렇기에 데이터를 믿고, 알고리즘이 도출한 결과를 순간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의 최적의 경로는 허준이 교수가 말한 대로 80세라는 세월이, 삼 만이라는 시간이 드리우는 거대한 시간의 분절에 의해 우리의 직관이 인생의 전체의 경로를 인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생의 최적의 경로는 숫자나 데이터보다 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열정이나 사랑, 가족이나 사랑하는 연인, 아픔이나 고통, 슬픔이나 연대, 우연과 추억과 같이 수없이 많은 변인들이 어울리며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를 흔들며 시행착오를 겪게 합니다. 그런 모진 최적의 경로를 거쳐가는 우리에게는 우리는 조금 친절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냐면 모두에게 험난한 길이기 때문이죠. 허준이 교수는 그런 과정을 거치는 우리 자신에게 친절하길 바라며, 오늘의 친절이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소원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최적의 경로를 찾는 나와 여러분에게 바라건대, 자신의 인생에 친절한 길 안내자가 되어주면 어떨까요. 매번 바뀌는 변수와 결과에 따라 시간과 비용을 낭비해도 좋습니다. 그럴 때마다 실패가 아니라 최적의 경로를 찾아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응원하는 겁니다. 우리의 최적화의 낭비는 없습니다. 구불구불할 수 있습니다. 오르락 내리락해도 좋습니다. 결국 우리 각자에게 맞는 최적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허준이 교수님의 축사를 따라 글을 마무리합니다.


응원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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