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꼴이 천차만별이든 나만의 "꼴"값을 찾기를 바라며
"아, 폰트 깨졌다"
포브스 선정 카피라이터가 들으면 가장 겁나는 소리 1위. 기획서나 보고서를 자주 작성하는 직장인이라면 한 번 쯤은 겪어 봤을 곤란함입니다. 마땅히 문서와 함께 저장했어야 하는 폰트가 함께 저장되거나 PC에 설치되어 있지 않아 이른바 가장 기본 폰트로 돌아간 상태를 말합니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주로 '폰트가 깨졌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클라이언트 앞에서 철저하게 준비한 기획안을 선보여야 하는 발표에서 옥의티는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깨진 폰트가 그 옥의티인 거죠. 이럴 때면 팀 막내였던 저는 부랴부랴 USB에 다시 폰트를 넣어 발표 PC에 설치하거나, 폰트가 일부 깨진 상태라면 맑은 고딕이 아닌 다른 그럴듯한 폰트로 잽싸게 바꾸어 사태를 수습하곤 했습니다.
카피라이터처럼 폰트에 따라 카피의 감성이 완전히 달라지는 직업일수록 작은 차이에 민감합니다. 디자이너들은 말할 것도 없죠. 폰트 사이즈는 물론 '볼드니스'라 불리는 아주 작은 굵기의 차이에도 민감합니다. 그래서 같은 폰트라고 하더라도 아트 디렉팅에 의도된대로 배치되어 있는지, 자간과 행간은 적당한지, 굵기는 어떤지 세밀하게 따집니다. 맞춰 놓은 오와열에 갑자기 폰트가 깨지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예를 들어, 무신사의 브랜드실에서 멋지게 제작해서 지금은 무신사의 시그니처가 된 '무진장' 타이틀 폰트를 상상해봅시다. 누군가의 실수로 붓 글씨와 같은 강력한 폰트가 빠지고 맑은 고딕으로 세상에 나왔다면, 아마 지금과 같이 과거와 현재가 크로스오버되는 독특한 느낌의 정체성은 감성이 느껴지지 않았을 겁니다.(물론 이 경우엔 새로운 로고를 디자인한 것이기에 실제로 폰트가 깨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제가 '무진장'의 카피라이팅을 처음 떠올릴 때는 없었던 감성이기에 이는 전적으로 컨셉을 디벨롭하고 디자인을 맡아주신 분들의 덕입니다.
재밌는 사실은 우리가 깨진 폰트라고 표현하는 맑은 고딕은 사실 대부분의 PC나 맥에서 설정해둔 기본 폰트 입니다. 영어폰트로 가정한다면 Arial이나 Calibri 격이 되는 거죠. 그런데, 정말 맑은 고딕은 깨진 폰트일까요? 한번은 맑은 고딕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맑은 고딕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맑은 고딕은 '산돌이 개발한 한글 고유의 서체 디자인으로 고해상도 디스플레이 전용으로 개발된 최초의 한글폰트입니다. 한국적 조형미를 살리고 가독성을 극대화 시킨 서체로 컴퓨터에서 한글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디자인됐어요'라고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산돌에서 제작하고, 마이크로소프가 공식적으로 배포한 정식 폰트죠. 한국적 조형미를 살린 최초의 한글 폰트라니 달리 보이네요.
"언제부터 맑은 고딕은 깨진 폰트가 되었을까?"
이 지점을 떠올리면서 저는 맑은 고딕의 '깨진 폰트화'가 어딘가 우리 세대의 성장과정과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폰트라는 말을 우리 각자의 개성과 능력이라고 치환해서 생각해보시죠. 부모님의 사랑으로 세상에 온 우리는 지문조차 겹치지 않을 만큼 고유의 꼴을 하고 태어납니다. 중첩되거나 배척되지 않은 온전한 나만의 개성을 손에 쥐고 태어나는 셈이죠. 다만, 우리는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기에 가정과 사회에의 훈육을 통해서 어른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대게 우리나라의 경우 부모님의 훈육과 학교의 입시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에서 원하는 인간상, 심하게는 특정 인재상이 되도록 교육 받습니다. 이때를 폰트에 비유하자면 어른들은 아이들이 모나지 않고 바르게 자라라는 의미에서 대부분 '맑은 고딕' 으로 자라나길 기대합니다.
조금 풀어서 이야기해볼까요? 우리의 맑은 고딕체 학생은 이렇습니다. 이 학생은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말씀 잘 듣고, 부모님의 칭찬을 먹고 자랍니다. 맑고, 바르게 자라는 것이 학생으로서 최고의 도리라 배웁니다.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좋은 대학을 목표로 입시에 최선을 다합니다. 지금 당장의 맑은 고딕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군말하지 않습니다. 학생이니까요. 나의 적성도 중요하지만, 학생이라면 모름지기 학교 생활을 충실히 하고, 모범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가장 먼저입니다. 맑은 고딕이 어쩌면 우리에게 부여된 최고의 폰트라고 배웁니다. 여기 까지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맑은 고딕도 예쁜 폰트이니까요.
문제는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거나, 대학생이 되면서 시작됩니다. 취업시장에 뛰어들면서 처음으로 이력서를 써내려가면서 멈칫하는 겁니다.
"자가소개 해보세요"
"지원동기와 본인의 역량을 서술하시오"
"지원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지원 분야와 본인의 경험과 강점을 서술해주세요"
세상에. 맑은 고딕으로 자라온 우리에게 갑자기 색다른 개성과 이야기를 원합니다. 취업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죠. 남들보다 돌출되어 앞서가기 위해 각자의 개성과 취향, 강점을 길러 각자만의 폰트를 가져야 한다는 거죠. 요즘엔 이런 경우를 더 빨리 마주하곤 합니다. 고등학교 때 생기부를 작성하면서 먼저 겪게 되기 때문이죠. 내가 어떤 폰트의 모습인지도 알기 어려운 나이에, 내가 원하는 꼴의 모습까지 서술하라니 바로 '멘붕'인 거죠. 그래도 우리는 포기란 없다고 배웠습니다. 깃털을 한껏 세운 공작처럼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우리를 포장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겁니다.
진심울림체: "저는 커피 분야에 누구보다 진심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마신 커피만 해도 3,000잔입니다.."
휴먼굴림체: "제 별명이 너무 열심히 구른다고 '굴렁쇠'입니다. 뽑아만 주신다면 누구보다 열심히.."
경험세계일주체: "저는 여름 방학에 히말라야 등반을 다녀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럽 13개국을..."
만능에이스체: "저는 학교 다닐 때 1등 놓쳐 본 적 없습니다. 현재는 창업 동아리 회장을 역임 후.."
폰트에 빗대어 표현해서 낯설지 몰라도 실제로 한번 쯤은 자소설을 쓰느라 24시간 카페에서 애써본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화려하고, 유능하고, 준비된 인재처럼 보여야 우리는 남들이 알아주는 기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헌데, 놀랍게도 이 모든 '화려한 폰트 시절'을 지나 취뽀에 성공하고나면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회사에서 다시 '맑은 고딕'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어느 직장이든 조직이 있는 곳엔 규율이 있고, 전통이 있습니다. 취뽀를 통해 기꺼이 그 톱니바퀴에 일부가 되는 순간, 회사는 화려한 폰트보다 조용한 '맑은 고딕' 같은 직원을 원합니다. 회사의 규율에 따르고, 자신의 목소리는 낮추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직원을 선호합니다. 우리는 당황합니다. 온갖 화려한 수사를 통해 나 자신을 부풀려 취업 시장에서 생존하자마자, 이제는 그 개성을 버리라는 이야기를 듣는 거니까요.
MZ 세대들의 조용한 퇴사는 그렇게 시작됩니다.(*회사를 다니긴 하지만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노력하지 않는 상태). 회사에서 자아실현이나 커리어 발전을 도모하기 보다는 월급을 받아 나의 진짜 삶을 영위하는 쪽을 선택하는 거죠.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틀안에서 취업을 위해 노력했다가, 정작 회사에 들어가고 나서 내가 무슨 일 하고 있는지, 혹은 이 길이 맞는지 고민하다가, 이 곳은 나와 어울리는 곳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조용한 퇴사를 선택하거나 이른 퇴사를 선택하게 됩니다. 물론, 개인차는 천차만별입니다. 요즘엔 스타트업에선 직원 각자의 개성을 업무의 역량으로 끌어오고자 노력하는 게 트렌드이기도 하고요. 일반화 할 수는 없죠.
이런 고민에 빠졌을 때 개인에 입장에선 왠지 나만 잘못되었다는 생각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마치, 우리가 폰트가 '맑은 고딕'으로 돌아갔을 때 깨진 폰트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정제되고 차분한 폰트들 사이에서 '로케트체'와 같은 화려한 서체는 눈에 확 띄기 마련이죠. 회사라는 공간에서 주변을 돌아봤을 때 남들 눈에 과하게 튀지 않을지 눈치를 보게 되면 위축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은, 이는 개인의 문제는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 사회가 튀는 걸 꺼려하는 눈치 보는 사회이기 때문이기도 하죠. 나만의 개성을 뿜어내는 20대들의 패션을 보면서 'MZ세대 패션' 이라고 구분 짓기 좋아하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그저 각자의 추구미에 따라 입었을 뿐인데 어떤 분류 속에 넣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심리가 작용하기도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모양대로 그저 살아가면 그뿐"
폰트는 우리말로 글꼴이라고 합니다. 글은 글인데 꼴이 어떻게 생겼냐라는 거죠. 저는 이 말에 해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능을 본 분들이라면 모두 필적 확인란을 기억하실 겁니다. 필적 확인을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손으로 글씨를 쓰면 사람마다 고유의 필체가 있어 본인임을 증명하게 되는 거죠. 40만명이 필적란에 글을 쓰면 40만개의 글꼴이 만들어집니다. 단 한명도 똑같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다른 꼴을 하고 태어난 것처럼요. 참 멋진 자기 증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체가 다른 만큼 우리는 생각도, 근육도, 시선도, 말투도, 생김새도, 삶의 궤적도, 가는 길도, 행복의 방식도, 추구미도, 삶의 태도도 모두 다릅니다. 그래서 일까요? 매년 수능 시즌만 되면 필적 감정을 위한 문구에 관심이 쏠립니다. 그곳에 수험생의 마음을 토닥여주는 한 줄이 적혀있기 때문이죠.
지금 혹시 남들과 다른 꼴에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분이 있다면 이 말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레이아웃에 맞춰 자신에게 맞지 않는 '꼴'이 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죠. 그냥 '꼴'값 하면서 살면 됩니다. 손으로 새기는 나만의 정체성이 글꼴인 것처럼, 마음으로 새겨놓은 있는 그대로의 나만의 모습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렇게 바라보면 세상에 깨진 폰트는 없는 셈입니다. 모두가 나에게 어울리는 레이아웃, 색상, 내용을 잘만 찾는다면 그 어떤 모양이더라도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자신만의 글꼴을 사랑하는 연습을 해보십니다. 처음 우리가 연필로 글쓰기 연습을 시작했던 그때처럼요.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