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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도 능력일까

다정을 타고나진 않았지만, 갈고닦고 있습니다

by 쪼의 세상

잦은 이직으로 인해 비자발적 프로면접러가 돼버린 탓에 면접이 익숙해졌습니다. 현재 다니는 직장도 입사를 위해 면접만 다섯 번을 봤으니까요. 면접은 늘 긴장됩니다. 불확실한 상황을 줄이기 위해 면접 전날에 늘 예상 질문 리스트를 뽑아놓고 스스로 답변을 하면서 연습을 합니다. 그럼에도 심장을 쿡 찌르는 답변이 종종 들어온다. 최근에 가장 인상 깊었던 질문은 바로 이 것.


"카피라이팅 외에, 업무 할 때 본인의 강점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선생님, 하느님, 부처님 맙소사. 카피라이팅 외에 장점을 말씀하시라 하면 이건 반칙이지요. 당황함에 동공지진이 면접관에게 들키기 전에 머릿속을 헤집어 답했습니다.


"제 강점은 다정함인 것 같습니다. 항상 팀원들 사이에서 다정한 협력자가 되고자 합니다. 설명하거나 협의할 때는 늘 다정한 말과 행동으로 다가갑니다"


세상에, 어쩌자고 저런 말을 뱉었을까요. 제 딴에는 커뮤니케이션을 능숙하게 잘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다정함'이라니요. 말을 뱉어놓고 어떻게든 수습했지만 이 대답이 면접에 적합한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면접은 기본적으론 거짓 없이 업무에 내가 얼마나 적합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나는 나는 정말 지나왔던 회사 동료들에게 다정한 사람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업무로 소통하다 얼굴을 붉힌 일, 일정에 압박으로 동료에게 언성을 높였던 일, 감정이 상해 험한 말을 할 뻔한 순간들이 스쳤습니다. 금세 찔릴 답변을 해버린 셈이죠. 다른 하나는 다정함이 과연 능력이 될 수 있을까였습니다. 업무 능력에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필수입니다만, 다정함은 소통의 한 부분일 뿐 전부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프로답게 답변해야 하는 자리인 면접에서 다소 순진한 답변은 아닐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다정도 병이다?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내가 다정하다는 말은 언제부터 조금 나약한, 순진한 단어처럼 느끼고 있었을까.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다정도 병이다"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요즘은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이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흉흉한 분위기입니다. 누구도 쉬이 믿을 수 없는 세상이기에 다정한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일을 오지랖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상대가 굳이 요청하지 않은 친절을 경계합니다. 뭔가 따로 원하는 게 있을까 의심을 하기도 하죠. 그만큼 개개인의 관계에서 의심이 자라나고, 소통의 장애물도 많아졌지요.


업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K 직장인으로서 일할 때만큼은 냉철하고 이성적이고, 전략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기본값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괜한 사적인 감정을 섞는 것은 오히려 경계하는 분위기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회사에서의 선배든 후배든 다정함은 정도를 정확히 지키지 못할 거라면 오히려 독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약간은 개인주의가 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특히나, 으쌰으쌰 가족 같은 문화가 익숙했던 시기와는 요즘 회사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부장님이 괜히 점심을 먹지 않은 대리에게 같이 점심 먹자고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가는 눈치 없이 신성한 자유 시간인 점심의 평화를 깨트린 꼰대가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비슷한 예시로 요즘 '오글거린다'라는 표현을 참 많이 씁니다. 성격유형검사인 MBTI에서 감정적인 성향이 짙은 F들이 자주 받는 공격이죠. 영화를 보고 주인공의 사랑의 감정이 공감을 하거나, 어떤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거나, 누군가를 향한 진정 어린 애정표현에 우리는 쉽게 오글거린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대상에 대해 나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표현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억누르고 사는 것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처럼, 회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가 전반적으로 다정함, 친철함, 따뜻함의 가정을 나약함, 순진함,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태도 정도로 치부하는 다소 냉소적인 사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요즘, 희귀해졌다는 재능. 바로 다정함"

면접의 한가운데에서 다정함을 외친 저의 불안함을 잠재우고 의심을 지우게 된 건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한 게시물 덕분이었습니다. 알고리즘도 제가 고민에 빠져있던 걸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추천 게시물에 마치 하늘의 게시인 것처럼 이 나타난 글이 있었습니다.

출처: https://www.instagram.com/p/DC3wzv-h_Xy/?img_index=4&igsh=MWZjbG40aGlubGl2ag%3D%3D

한 소셜 메신저에서 자매로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입니다. 동생이 언니에게 비속어의 뜻을 물어보자, 언니는 아마도 기분이 나쁠 때 무심코 하게 되는 속된 말 정도라고 설명해주려고 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언니는 "나 두 시간 넘게 기다렸을 때 기분이 어땠어?"라고 물어봅니다. 기분이 나빴던 경험을 떠올리게 하고 설명해주려고 했던 거죠. 근데, 동생의 대답은 정반대였습니다.


'보고 싶었지'


머리를 띵 맞은 것 같았습니다. 긴 시간 언니를 기다렸던 시간 동안 짜증이나,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오지 않는 언니가 보고 싶었다고 답한 거죠. 그리고 위에 적혀 있는 '요즘은 희귀해졌다는 재능'이라는 말이 제 마음속에 와서 박혔습니다. '아,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구나' 그리고 동시에 잊고 있었던 다정함의 힘을 느끼는 한마디였습니다. 게시물의 댓글에는 '다정이 최고야', ' 다정, 다정 사랑해요'라는 다정함을 예찬하는 말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수만 명의 이용자들이 좋아요를 눌렀죠. 이 외에도 온라인에서 유명한 다정한 순간들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가져와봤습니다.



다정함 1
다정함 2
다정함 3
다정함 4

마지막 네 번째 다정함은 꽤나 유명한 글귀입니다. '잘 배운 사람의 다정함이 좋다'라는 말. 여기서 배움은 지식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상대방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 보는 마음과 태도를 뜻하는 것이죠. 이건 학습한다고 길러지지 않습니다. 알고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죠. 이런 류의 배운 다정함은 끊임없이 노력해서 얻어진 실천의 결과일 겁니다.

저 글귀에 비추어 봤을 저는 다정함을 타고난 사람은 아닙니다. 재능이 없는 거죠. 다정학 박사가 있다면, 단연코 저는 아닐 겁니다. 탁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잘 배운 다정함'이란 말에 공감이 많이 되더군요. 어쩌면 면접에서 제가 다정함을 능력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 있는 것인지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생각보다 예민하고, 친절한 말투를 타고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땐 좀 더 유별났죠. 그래서 말솜씨도, 손짓도, 몸짓도 하나하나 조심스럽고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스스로가 마음이 여렸기에, 남에게 저도 모르게 상처 주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재능은 없지만, 더듬더듬 열심히 다정함을 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제가 발표하거나 강연을 마치고 나면 어딘가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고 피드백을 받을 때가 가장 뿌듯했습니다. 실제 성격은 엉망진장인 것과는 별개로요(쉿). 그렇습니다. 재능을 타고나지 않은 제가 보기엔, 다정함은 노력해서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능력이었던 거죠. 아니, 그러길 바랍니다. 다정함도 능력이길 바랍니다. 그것도 슈퍼파워이기를.


혹시 알까요. 다정함이 세상을 구할지.

다정함은 사실 좋은 동료로서 뿐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정함은 힘이 있습니다. 친구로서, 가족으로서, 연인으로서, 슬플 때 어깨를 내어줄 수 있는 사람, 기쁠 때 기쁨을 배로 만들어줄 사람, 작은 순간순간에 다정함으로 마음을 훈풍으로 녹이는 사람. 다정함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었든 좋은 능력이 되어줄 겁니다. 저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에 다정함을 타고난 분이 있다면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요즘 같은 시대에 부족한 희귀한 재능을 타고나셨을지도 모릅니다. 저처럼 다정함을 타고나지 못했더라도, 괜찮습니다. 더듬더듬 다정함을 몸에 익히고 배워서 일상과 사람 사이에 스며들게 합시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데, 다정함 한번 역시 그런 역할을 못하리란 법도 없습니다. 혹시 알까요. 다정함이 세상을 구할지. 귀여운보다도 먼저요. 자, 오늘부터 다정함 기르기 1일을 시작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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